플랫폼 강국이라더니 반칙 막을 법 제정은 ‘하세월’
22대 국회 핵심법안 플랫폼법 (2) 해외사례
한국은 플랫폼업계 반발에 공전만 거듭 … 유럽은 이미 시행, 해외선 입법에 속도
미국·영국·인도·일본 연내 제정 움직임 … 모두 ‘지배적 사업자 사전지정’ 포함해
정부가 플랫폼 공정경쟁촉진법(플랫폼법) 제정 계획을 밝힌 지 반년이 지났지만, 논란만 되풀이하고 있다. 그 사이 해외에서는 ‘지배적 사업자 사전 지정’과 ‘의무 부과’를 골자로 하는 규제 법안 입법에 속도를 내고 있다. 때를 놓쳤다간 ‘플랫폼 선진국’을 자처했던 한국이 자칫 공룡 플랫폼의 반칙과 횡포로 지속가능성을 잃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조만간 구글이나 애플 등 초거대 플랫폼의 독점적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23일 공정거래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미국과 유럽, 일본 등 해외 주요국 대부분은 플랫폼 관련 규제 입법을 추진 중이거나 시행하고 있다.
◆유럽은 이미 시행 1년 = ‘플랫폼 규제’의 선두 주자인 유럽연합(EU)에서는 지난해 5월부터 디지털 시장법(DMA)이 시행됐다. DMA는 플랫폼 분야별로 시장을 지배하는 사업자를 ‘게이트 키퍼’로 정하고 각종 의무를 부과하는 법안이다.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플랫폼법과도 비슷하다. 소수의 핵심 플랫폼을 ‘지배적 플랫폼 사업자’로 지정하고 자사우대와 끼워팔기, 멀티호밍 등 4대 반칙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 우리 플랫폼법의 골자다.
EU가 지정한 규제대상 플랫폼(게이트키퍼)은 모두 6개 사업자다. EU 경쟁당국은 법 시행 이후인 지난해 9월 정량 요건과 정성 요건을 고려해 검색엔진, SNS, 중개 서비스 등 10개 서비스 분야에서 6개 사업자(알파벳, 아마존, 애플, 메타, MS, 바이트댄스)를 게이트키퍼로 지정했다.
유예기간을 거쳐 올해 3월부터는 게이트 키퍼에게 적용되는 의무 규정들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최혜 대우를 비롯해 자사 우대, 멀티호밍 제한, 끼워팔기 등 대표적인 불공정 행위가 금지됐다. 데이터에 대한 무료 접근 허용이나 선탑재 애플리케이션 허용 등 작위 의무도 부과됐다. 게이트키퍼들은 이 밖에도 디지털 관련 기업 인수 계획 시 EU 경쟁당국에 사전 통지해야 하는 의무를 진다.
입점업체 또는 최종이용자에게 회복 불능의 피해가 발생하는 긴급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임시 중지 명령도 부과될 수 있다.
처벌 규정의 수위도 높은 편이다. 관련 법 위반 시 전 세계 매출액 10% 이하의 과징금 부과가 가능하며, 8년 내 동일·유사한 법 위반 행위 재발 시 부과 한도가 2배 상향된다.
◆미국·영국도 연내 법 제정 움직임 = 시장 반응은 빠르고 긍정적이란 것이 정부 판단이다. 박설민 공정위 디지털경제정책과장은 지난 21일 개최된 플랫폼법 토론회에서 “1~2개의 독과점 플랫폼 기업이 만드는 규칙에 따라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공정위의 판단”이라며 “이는 전 세계적인 공감대”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EU가 3월부터 시행 중인 디지털시장법(DMA)은 그 효과가 즉각 나타나고 있다”며 “콧대 높던 대형플랫폼들이 수수료를 낮추고 자사 우대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영국도 디지털 시장 경쟁·소비자 법안을 지난해 4월 발의한 상태다. 현재 의회에서 최종 합의가 진행 중이며, 올해 상반기 중 제정이 예상된다. 이 법안 역시 정성적·정량적 요건을 고려해 지배적 사업자를 ‘전략적 시장 지위 플랫폼’으로 사전 지정하고 각종 의무를 부과한다는 점에서 DMA와 유사하다.
전략적 시장 지위 플랫폼으로 지정된 업체들은 공정하고 합리적인 거래 조건을 설정, 실효적인 분쟁 절차 마련, 이용자에게 명확하고 접근할 수 있는 정보 제공 등 의무를 지게 된다.
자사 우대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 불공정 행위를 금지하는 의무 규정도 적용받는다. 기업결합 신고 의무나 임시중지 명령 부과 조항, 전 세계 매출액의 10% 이하로 규정된 과징금 규정 등도 DMA와 비슷하다.
미국은 ‘온라인 선택과 혁신 법안’이라는 이름의 플랫폼 규제 법안이 상원에서 논의 중이다. 이 법안도 정량적·정성적 요건을 고려해 지배적 사업자인 ‘적용 대상 플랫폼(covered platform)’을 지정한다. 금지유형은 자사 우대 금지 등 10가지로 EU보다 더 많다. 관련 법 위반이 적발되면 민사 벌금이나 금지명령, 임시중지 명령 등이 부과될 수 있다. 벌금은 위반 기간 미국 내 연매출액의 10% 이하로 부과된다.
◆한국보다 빠른 인도·일본 = 이밖에도 인도와 일본도 플랫폼법 제정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인도는 지난 3월 정부 주도로 디지털 경쟁법 제정안을 공개했고, 이달까지 의견 수렴을 진행 중이다. 일본은 당정 협의로 지난 4월 플랫폼 규제 방안을 담은 법안을 발의했으며 상반기 통과를 목표로 의회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두 법안 모두 지배적 사업자를 사전 지정하고, 각종 금지 행위와 의무를 부과하는 등 서구권 플랫폼 규제 법안과 유사한 구조로 설계됐다.
특히 인도는 자국 시장에서 지배적 위치를 가진 ‘토종 플랫폼’이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상황과도 유사하다. 인도의 ‘플립카트’는 e커머스 분야에서 아마존을 압도하며 인도 내 1위 사업자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데, 향후 법안이 시행되면 시장 지배적 사업자로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경우 플랫폼 독과점 규제 관련 입법은 상대적으로 늦었지만, 플랫폼과 입점업체 간 갑을 관계를 규율하는 법안은 이미 제정돼 시행 중이다.
한편 우리 공정위는 해외 플랫폼 규제 움직임에 발맞춰 지난해 12월 시장 독점력을 가진 핵심 플랫폼 사업자를 사전 지정하고, 감시를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플랫폼법 추진 계획을 밝혔다.
공정위는 당초 올해 2월쯤 정부안을 발표하고 입법에 속도를 낼 예정이었지만, 법 제정을 둘러싼 업계 반발을 우려한 여권이 플랫폼법 발의 요청에 난색을 보이면서 계획에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결국 공정위는 당초 계획한 정부안 발표를 미루고, 의견수렴 절차를 더 거치기로 했다. 총선이 끝난지 한달 넘게 지났지만 플랫폼법은 아직까지 ‘잠정 보류’ 상태로 공전 중이다.
성홍식 기자 king@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