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 산책
깊고 깊은 베트남 역사 속으로
필자의 전공은 정치학으로 동남아의 비교정치를 연구 강의해왔고, 오래전 인도네시아의 정치경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런데 정작 필자가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을 느끼고 있는 나라는 베트남이고 그중에서도 역사에 관심이 많다. 베트남 역사를 생각할 때마다 필자는 진한 감동을 느끼고 귀한 교훈을 얻는다.
베트남에 대해 한국인 여행가들이나 작가들이 쓴 대중서를 보면 한결같이 한국과 닮은 것이 많다고 쓰여 있다. 특히 역사는 외침과 외세의 지배, 단일민족과 분단, 내전, 경제발전으로 이어지는 과정과 단계들이 많이 유사해 보인다. 양국민이 느끼는 문화적 친밀감도 높아 한국 대중문화는 베트남인들의 지속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베트남은 동남아에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여행하고 거주하는 나라이며, 심지어 배우자 후보로도 베트남인이 인기 1위를 차지한다. 10여년 전 베트남 주석이 한국을 “사돈나라”라고 불렀듯이 베트남은 한국에게 ‘아주 특별한 외국’인 게 사실이다.
그러나 베트남을 전공하는 학자들은 두 나라가 닮았다고 하는 주장들에 불만을 드러낸다. 문화는 요즘 세상에서 빨리 확산되고 상호 접변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지만, 지나간 역사는 고정되어 변할 수 없는 사실인데 관찰자들의 주관적인 인식이나 편향된 가치관이 그런 피상적인 해석을 낳게 한다고 비판한다.
두 나라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볼수록 추상적 수준에서의 유사성은 옅어지는 반면, 구체적이고 맥락적인 차별성은 뚜렷해진다. 물론 필자는 베트남의 역사를 부러워하거나 우리의 역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베트남이 겪은 끔찍한 고통을 부러워할 턱이 없고, 우리 조상들이 감내한 외교적 굴욕이 숨긴 지혜를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세계사에 유례 없는 항전의 역사
우선 베트남의 ‘경이롭고 기묘한 역사들’을 먼저 정리해보자. 첫째는 베트남인들이 당한 외침과 항전의 역사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빈번하고 끈질기고 다양했다. 한나라 때부터 1000년 넘게 중국의 지배를 받은 북속(北屬)시기와 70년의 프랑스 식민통치기를 빼 놓고 보더라도 30년 동안 몽골과 20년 동안 명나라의 침략과 점령을 당했고, 청나라를 포함 베트남과 국경을 접했던 모든 중국 왕조들과 큰 전쟁을 벌였다. 새로운 통일왕조가 설 때마다 베트남을 침략하거나 괴롭혔다. 중국 주변의 다른 민족이었다면 소멸하거나 중국의 한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것이다.
근현대 들어 프랑스와 미국의 외침이 이어졌고, 베트남은 이 서양강국들까지 물리쳤다. 중국을 접하고 있어도 베트남은 더 이상 전쟁에 대한 공포는 없다. 베트남을 침공할 나라는 더 이상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외침을 한 나라 중에서도 특별한 중국과의 평상시 관계는 경이롭다 못해 기묘하기까지 하다. 근자에 중국 시진핑 주석의 발언으로 한중관계도 세간의 주목을 받은 적이 있지만 중국과 주변국가의 관계는 쉽게 ‘조공관계’로 표현되는 것처럼 단순하지도 획일적인 관계도 아니다.
베트남의 역대 왕조는 중국에 조공하고 책봉을 받았으나 내부적으로는 줄곧 자신의 왕을 황제로 지칭했다. 북속시기를 제외하면 베트남을 장악했던 토착왕조들은 대부분 칭제를 하고 독자 연호를 썼다. 베트남의 끈질김을 아는 중국 조정은 이를 알고도 모른 척했다. 황제를 대신해 온 사신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지 않았으며, 사신들과 양국의 위상을 놓고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응우옌왕조의 민망황제는 국호를 다이남(大南)으로 고쳐 북에는 중국, 남에는 베트남이라는 식으로 중국과 맞짱을 떴다. 베트남이 중국이기를 끝까지 거부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동남아와 공유하는 수많은 문화적 특질들과 베트남어가 과거 잘못 알려진 것처럼 시노-티베트어족이 아닌 몬크메르어족의 일원이라는 문화적 언어학적 근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자력으로 독립 쟁취 … 다른 국가와 달라
셋째, 베트남의 식민지배 경험과 독립 과정 또한 남다르다. 프랑스는 베트남의 분열을 이용하고 획책해 이 끈질긴 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치른 희생과 감수한 비용은 훗날 식민지에서 창출한 이익보다 훨씬 컸다. 베트남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지 80년이 지난 1882년에야 하노이를 함락하고 외교적인 승리도 거두었으나, 이후 70년 동안 그치지 않은 청나라의 방해, 영국 미국 독일 등 서방국가의 간섭, 무엇보다도 구왕조 잔재세력의 저항과 독립운동의 태동, 일본의 침략은 식민지 통치비용을 급속도로 배가시켰던 것이다.
급기야 독립영웅 호치민이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1945년 이후 제1차 인도차이나분쟁에 말려 들어간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베트남에서 물러났다. 베트남의 탈식민지화는 베트남인들의 자력으로 성취했다는 점에서 다른 3세계 국가의 독립과정과 다르다.
넷째, 베트남이 그 많은 전쟁을 치른 뒤 수습하는 과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약 베트남이 전쟁이 끝날 때마다 상대국과 단교와 적대를 하고, 내부적으로 책임자와 부역자에게 책임을 묻고 보복을 가했다면 전쟁으로 점철된 베트남은 지금쯤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국내적으로는 분열돼 나라가 갈기갈기 찢겼을 것이다.
과거 베트남은 전쟁을 하다 퇴각을 하는 중국 군사들에게 밥을 먹여 퇴로를 열어주었고, 우리라면 철천지원수가 되었을 적국 미국에게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민 것도 모자라 20년 동안 수교를 ‘구걸’하다시피 해 성사시켰다. 우리는 “기억과 과거사 정리”를 못 벗어나고 있는데 베트남은 “화해와 미래 지향”을 외친 것이다. 물론 베트남도 혁명 중에 그리고 전쟁이 끝난 직후에도 적지 않은 반대자들이 희생을 당했지만 그 처리과정은 짧았고 희생자수는 비교적 적었다. 베트남의 전쟁후기는 간결하다.
다섯째, 베트남의 역사 얘기를 하면서 영웅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베트남인들의 용서와 화해 정신은 수많은 영웅을 기리는 훌륭한 사기열전을 남겼다. 조국 수호와 발전에 기여한 역사적 인물들이 저지른 잘못보다 기여한 바를 찾아 내 그들의 업적을 찬양하고 인물을 추앙하는 전통은 대도시 거리들을 그들의 이름으로 채울 정도로 많은 수의 영웅을 만들어냈다. 뿐만 아니라 54개의 소수민족을 베트남국민 하나로 묶고, 북 중 남부로 갈라진 지역적 종족적 균열을 봉합하고, 전쟁과 이념갈등으로 분열된 근현대를 하나로 엮어 위대한 통일베트남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으로 삼았다.
근현대사 속에서는 단 한사람의 영웅도 찾을 수 없게 역사적 인물들을 현재의 잣대로 난도질하고 우리나라의 영웅은 세종대왕과 이순신 두사람밖에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지나치게 날카로운 우리 역사의식의 칼날은 언제쯤 적당히 무디어지고 무던해질지 궁금하다.
실용주의와 다원주의의 절묘한 조화
마지막으로, 베트남의 전 역사를 요약할 수 있는 베트남인의 정신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라면 모든 시간적 공간적 차이와 간극을 좁히고 메워주는 강력한 실용주의가 아닐까? 베트남에 유입된 그 수많은 종교 철학 이념 문화가 있었지만 근본주의 교조주의는 없다. 중국의 지배를 1000년을 받았어도 성리학은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베트남의 불교 전래는 2~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세상의 모든 종교, 다양한 전통 종교도 한 자리씩 차지하는 종교다원주의 사회다.
베트남의 실용주의는 베트남 사회의 다원주의와 짝을 이룬다. 호치민은 공산주의자였을까, 민족주의자였을까? 개혁개방 후의 베트남은 자본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가, 여전히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는가? 작년에 베트남 수출에서 외국계 기업이 차지한 비중이 73%에 달했고, 삼성베트남의 수출만 17.5%를 차지했다는데 왜 이를 규탄하는 공산당 간부도 좌파 지식인도 베트남에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 답을 찾아 베트남 역사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