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홍식의 유럽 톺아보기
유럽선거, 여전히 굳건한 기민주의와 극우의 부상
지난 6~9일 치러진 유럽의회 선거 결과를 통해 2020년대를 이끌어갈 유럽 정치지형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임기 5년의 유럽의회 선거는 1979년 이후 정기적으로 9와 4로 끝나는 해에 유권자의 직접 투표로 치러졌다. 2019년에 이어 진행된 2024년 선거는 3억5000만에 달하는 유권자가 720명의 의원을 뽑는 민주주의의 대잔치였다. 6월 초 비슷한 시기 막을 내린 인도의 10억여명 유권자보다는 수가 적지만 유럽은 27개국의 국민이 참여하는 다국적 선거로 다양성이 돋보이며 의원수도 인도(543석)보다 많다.
우파 약진했지만 중도협력 계속될 듯
이번 선거를 통해 두개의 커다란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극우 민족주의 세력의 부상이다. 유럽통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극우세력들은 유럽의회에서 이제 1/4 이상의 의석을 차지할 정도로 세력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민족 중심 시각을 가진 이들 정치집단은 유럽 차원의 협력에는 능하지 못하다. ‘정체성과 민주주의(I&D)’ 그룹과 ‘유럽보수개혁당(ECR)’으로 나뉘어 있으며 헝가리의 집권당 ‘시민동맹(Fidesz)’이나 ‘독일을 위한 대안(AfD)’ 등 위의 두 그룹에 동참하지 않는 세력도 여럿이다.
다른 하나는 유럽연합(EU) 차원의 집권세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중도집단에 대한 꾸준한 지지다. 극우가 통합을 비판하는 세력이라면 중도는 유럽연합의 중심축을 형성하면서 통합을 주도하는 기독교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자유주의 세력의 연합이다. 따라서 선거 결과를 종합적으로 평가한다면 민족주의 극우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통합 동력을 지탱하는 중도 집권세력의 유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좌우의 전통적 관점으로 유럽의회 선거를 바라본다면 우파의 압승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극우가 의석의 1/4을 차지하면서 기염을 토했고, 중도 우파를 대표하는 기민주의 유럽인민당(EPP)이 186석으로 의석수를 늘리며 원내 제1당의 지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중도좌파의 사회민주당(S&D)은 140석에서 135석으로 줄었고, 자유주의 세력 ‘리뉴(Renew)’는 102석에서 79석으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유럽연합의 정치는 좌우의 양극화나 대립보다는 중도 대 극단의 구도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역사적으로 기민과 사민주의세력은 2010년대까지 수십년 간 의석수 과반을 차지했고 중도 좌우의 협력으로 유럽통합을 이끌어왔다. 2019년 처음으로 자유주의 세력 리뉴가 집권구조에 동참해 3자연합을 형성했고, 2019~2024년 유럽을 이끈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기민·사민·자유연정을 통해 유럽 입법의 대부분을 추진했다. 이번 임기에도 같은 방식의 중도협력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EU의 정치제도는 매우 복잡하다. 선거가 끝났다고 향후 5년의 정치 구조가 결정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제부터 선거 결과로 만들어진 지형을 바탕으로 무척이나 복합적인 협상과 타협의 게임이 벌어질 차례다.
일단 기민세력을 대표하는 EPP가 집행위원장 후보로 내세운 폰데어라이엔이 연임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EPP는 다양한 회원국 정치세력의 집합이고 따라서 일률적으로 폰데어라이엔을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집안 단속을 철저히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민·자유세력은 물론 기타 정당까지 최대한의 지지 세력을 확보해야 하는 이유다.
이번 선거에서 크게 위축된 녹색세력이나 심지어 이탈리아의 극우 조지아 멜로니의 지원도 폰데어라이엔은 은근히 바라는 모습이다. 그러나 극우를 향해 팔을 벌린다면 중도좌파 사민세력은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다. 독일의 사민당 출신 올라프 숄츠 총리는 이미 이런 유혹에 대해 경고한 바 있다.
EU는 27개국에서 각각 선출된 100여 개의 다양한 정치집단을 고려하는 전략뿐 아니라 회원국 정부를 설득하는 노력을 통해 유럽집행위를 꾸릴 수 있다. 일단 오는 17일 브뤼셀에서 EU 정상들이 모여 만찬을 나누며 유럽연합 요직의 명단을 결정할 예정이다. 집행위원장, 유럽 정상회의 상임의장, 외교안보 고위대표 등이 그 대상이다. 이날 합의를 보지 못하면 27일과 28일에 브뤼셀에서 열릴 정기적인 유럽정상회의까지 논의가 계속될 것이다. 회원국에서 합의한 유럽의 지도부는 7월 18일 유럽의회에서 투표를 통해 다수의 지지를 확보함으로써 공식 출범할 수 있다.
중도 집권연합 내부에도 다양한 이견
새로운 의회가 출범하는 이 시기에 유럽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쟁점은 세 가지다. 첫째, 유럽은 러시아의 안보 위협을 제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우크라이나전쟁은 유럽인들에게 공동 안보의 필요성을 일깨워주었고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복귀 가능성은 국제적 불안을 가중하는 상황이다. 유럽의 주요 세력은 방위 정책 강화에는 공감하면서도 재정적 방안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린다.
자유와 사민세력은 1000억유로 규모의 공채를 통해 유럽의 방위능력을 키우자고 주장하지만 기민은 반대하고 있다. 게다가 방위 분야에서 유럽주권론을 펼치며 논의를 주도한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이번 유럽선거에서 참패해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은 상황이다.
둘째, 폰데어라이엔 1기에서 야심차게 추진한 유럽의 그린딜도 논란의 대상이다. 녹색이나 사민 세력은 그린딜을 유지하면서 예정대로 밀고나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자유 및 기민세력은 환경문제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산업경쟁력에서 너무 큰 손해를 보게 되었다며 추가 환경규제의 일시적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중도 집권연합 안에서 사민·녹색 대 기민·자유의 대립구도가 만들어져 미래를 불확실하게 한다는 뜻이다.
극우는 한술 더 떠 그린딜을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겨울 유럽 각지에서는 농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그린딜 정책에 대한 불만을 집단으로 표출한 바 있다. 극우는 또 2035년으로 예정된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 금지 정책도 취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너무 급격한 전기자동차로의 전환은 중국의 세계시장 지배만을 가져올 것이라는 주장이다.
셋째, 유럽에서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이민문제는 예민한 쟁점이다. 특히 극우 민족주의세력이 부상하면서 난민·이민의 쟁점과 정체성의 문제를 들고 나와 첨예한 정치대립을 초래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민세력과 15개 회원국은 난민의 처리를 유럽이 아닌 외부에서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영국이 난민 처리를 르완다로 이전한 사례를 염두에 둔 주장이다. 그러나 사민이나 녹색세력은 이런 정책은 유럽인권조약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반대하고 있다.
이처럼 안보 환경 이민 등 주요 쟁점에서 중도세력의 내분이 만만치 않다. 중도 우파 기민당에 뿌리를 둔 폰데어라이엔이 중도 자유나 좌파의 사민과 협력에 방점을 두겠지만 녹색이나 일부 극우세력과 사안별 타협도 염두에 두는 배경이다.
프랑스 총선 따라 세계정치 흔들릴 수도
마지막으로 유럽의회 선거가 초래한 폭풍은 프랑스 조기 총선이다. 프랑스에서는 극우 민족연합(RN)이 1/3에 가까운 31%의 득표율로 마크롱 대통령의 세력(14%)을 2배 이상의 차이로 따돌리며 역사적 승리를 거뒀다. 이에 마크롱은 지난 2022년 선출된 국회 하원을 해산하고 새로운 총선 정국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도박에 나섰다. 충격적 패배를 도발적 베팅으로 헤쳐나가려는 전략이다.
6월 말과 7월 초에 치러질 프랑스 총선 결과에 따라 유럽의 정치와 더 나아가 세계 정치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불과 몇주 만에 프랑스 유권자의 선택이 기적처럼 달라져 마크롱이 성공한다면 프랑스를 넘어 유럽과 세계가 안정을 찾겠으나 극우가 다시 승리해 집권이라도 하게 된다면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나 트럼프 당선에 버금가는 혼란의 태풍이 불어닥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