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의 눈
‘물가변동 배제 특약’ 판결에 거는 기대
원자재 가격이 오르면 가장 고통받는 곳은 밑단에 있는 하청업체다. 발주처는 계약에 따른 공사비만 지급하면 되고 원청인 건설사는 원재료를 납품하는 하청에 이를 전가하면 그만이다.
원가에 못 미치는 저비용으로 공사를 하려는 발주처와 자잿값이라도 아껴 손해를 줄이려는 건설사의 오랜 관행은 부실공사를 일으킨다. 국민 주거를 불안하게 하는 원인이다. 지난해 인천 검단신도시 신축 아파트 단지 주차장 붕괴, 지난 5월 전남 무안의 한 아파트단지 부실시공에 의한 대규모 하자 발생이 대표 사례다.
발주처가 이처럼 배짱 발주를 할 수 있는 것은 ‘물가변동 배제 특약’ 때문이다. ‘물가변동 배제 특약’은 자재가격에 어떤 변화가 오더라도 이미 계약한 공사비를 추가로 줄 수 없다는 일종의 압력이자 불공정 거래다. 최근 1년 사이 공사비(서울지역 주택 시공 기준)가 30% 이상 인상됐지만 공사비 인상을 요구할 수 없도록 만든 족쇄와 같은 계약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대법원이 ‘물가변동 배제 특약’의 유효성을 인정하지 않은 판결을 내려 건설업계가 주목하고 있다. 대법원은 4월 부산 소재 교회가 시공사를 상대로 제기한 선급금 반환 청구 소송에서 시공사가 승소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부산고등법원은 해당 특약의 효력을 제한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고 대법원은 이를 심리 불속행 기각으로 확정했다.
재판부는 건설산업기본법 제22조 5항을 근거로 ‘물가변동 배제 특약’의 효력을 제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건설산업기본법에 따르면 계약 내용이 당사자 일방에게 현저하게 불공정한 경우 특약을 무효로 할 수 있다.
법원 판단은 상당히 전향적이었지만 이것만으로 기형적 하도급 구조가 개선될지는 의문이다. 납품 중소기업들은 납품단가를 원재료 가격 변화에 연동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납품단가연동제’ 법제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원사업자와 하도급업체간 거래 과정에서 원자재 가격이 변동하면 이를 납품단가에 반영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대표적인 품목이 시멘트와 레미콘으로, 시멘트업계는 2~4월에 가격을 17~19% 올린 데 이어 9월에 또 가격을 12~15% 올리겠다고 레미콘업계에 통보하며 갈등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납품단가연동제 법제화를 준비 중이다. 9월부터 납품단가연동제 도입을 위한 시범사업이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국제경제가 불안한 가운데 원자재 가격 변동폭을 감지하기 어려워졌다. 공사비 인상에 따른 부담은 발주처와 원청인 건설사, 납품회사인 중소기업이 공동으로 져야 책임시공이 가능해진다. ‘물가변동 배제 특약’을 불공정 거래로 본 법원의 판단과 정부의 ‘납품단가연동제’ 법제화 추진에 거는 기대가 높다.
김성배 산업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