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환의 동남아 산책
다문화국가 베트남 민족의 역사적 형성
한국인들이 동남아 국가들 중에서도 베트남에 가장 강력한 매력을 느끼는 것은 여러모로 확연하다. 동남아를 방문하는 한국인 3명 중 1명이 베트남을 찾고, 동남아 거주 한인들의 60% 정도가 이 나라에 집중되어 있으며, 심지어 국제결혼 상대도 베트남인 특히 베트남 신부가 부동의 1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베트남에 대해 한국인들이 갖는 특별한 애착을 말해준다.
동남아 전문가들과 대다수 한국인들은 두나라 간의 특별한 관계가 문화적 특질과 역사적 경험에서 나타나는 유사성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유교의 영향, 중국 주변 국가로서의 동병상련, 외침과 식민지 경험, 분단과 내전 그리고 고도성장 등 많은 문화적 역사적 공통점이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낳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통설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 비해 베트남이 좀 더 한국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두 나라 사이에는 유사성보다 차별성이 더 뚜렷하게 부각된다.
‘공식적으로’ 54개 민족의 다민족 국가
한국인들이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 갖고 있는 가장 큰 편견과 오해는 민족에 관한 것이다. 즉 베트남도 한국과 같이 ‘단일민족’의 유구한 역사를 가졌으며 단일민족으로서 정체성과 민족감정이 남북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오해가 그것이다.
물론 한국인들이 과연 단일민족인지, 한반도에서 민족이 역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전에 형성된 것인지, 남북한이 남북통일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과연 민족적 정체성과 일체감 때문인지, 심지어 일반론으로서 민족이 과연 허구가 아닌 실체인지, 만들어진 것이 아닌 본원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입장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베트남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다”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들을 제시해 보려 한다.
우선 베트남을 단일민족이라는 주장은 얼토당토않다. 단일민족은커녕 “아시아에서 가장 복잡한 종족적 언어적 유형을 보이는 나라들 중 하나”라고 브리태니커는 규정한다.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무려 54개의 종족(민족)으로 구성된 다문화 다민족 사회다. 여기서 공식적이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족 또는 민족개념은 학술적으로도 정의하기가 무척 까다로워 ‘공식적으로’ 즉 ‘정치적 행정편의적으로’ 54개로 단정해 버리고 만 느낌이 있다.
베트남 정보 책자나 사이트를 보면 베트남의 다수민족은 베트남족 또는 킨족으로서 전체 인구의 85%를 차지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종족적 범주와 ‘공식적’ 통계 또한 베트남 민족 형성의 ‘역사성’을 무시한 단순화와 수치화에 불과하다.
베트남 민족 형성의 역사는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길고도 복잡하다. 베트남 역사책들은 대개 기원전 10세기경 현재 북베트남 홍하델타지역에 살던 락족, 주왕조 이후 춘추전국시대까지 중국 양자강 이남 남동해안에 걸쳐 살던 월(越, 위에)족, 이 해안지역에 걸쳐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중국 한나라와 100년에 걸쳐 군사적으로 경합했던 난위에(南越, 남비엣) 왕국에서 베트남족과 베트남의 기원을 찾는다.
락족과 월족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는지, 난위에를 베트남 최초의 국가로 부를 수 있는지는 상이한 입장들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확실한 것은 오늘날 베트남의 첫 조상들은 중국 동남부부터 베트남 중부에 이르는 긴 해안지역에 흩어져 살았고, 그 대부분이 지금의 베트남보다는 중국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난위에는 기원전 111년에 한무제가 보낸 대규모 군대에 패퇴해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난위에는 9개의 군사지역으로 나눠지고 베트남은 1050년에 걸친 중국 지배 하에 들어갔다. 그런데 세계사적으로 놀라운 사실은 기원후 10세기 939년에 1000년의 암흑기를 뚫고 진짜 베트남인들의 나라가 탄생했다는 점이다.
물론 이렇게 탄생한 베트남의 백성들도 현재의 베트남인들과는 다르다. 응오왕조는 지금의 하노이 부근 지역을 근거지로 두었는데, 북쪽 산악지대에는 베트남인들보다 더 일찍이 몬크메르어족과 시노티벳어족에 속하는 다른 민족들이 터를 잡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이 고산족들보다 훨씬 수적으로 많고 정치경제적으로 강성했던 중부지역의 참족과 메콩델타지역의 크메르족이 독자적인 나라를 갖고 있었다. 2000여년에 걸친 외침과 저항, 내부 분열과 경쟁의 역사는 베트남 내 다양한 종족들을 베트남 민족으로 녹여내는 용광로가 된 셈이다.
중국 1000년 지배에도 굴하지 않은 저력
10세기까지 베트남이 중국의 1000년 지배에도 굴하지 않고 나름대로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은 중국의 착취, 중국인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차별, 그리고 이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끈질긴 집단 저항 덕분이었다.
독립 이후 900년에 걸친 베트남 왕조 시기들은 참파와 앙코르왕국 등 주변 국가들과의 끊임없는 전쟁과 경쟁, 16세기 이후 후 레왕조 치하 다이비엣(大越)왕국의 남북 분열과 정권 대립, 그치지 않은 중국의 침략과 위협, 중국에 이은 외세로서 프랑스의 등장은 베트남 엘리트들로 하여금 잠시라도 외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못하게 함으로써 베트남인들의 단결과 정체성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어 주었다.
중국이 베트남에 끼진 영향은 양면적이었다. 한편은 중국화로서 중국이 베트남을 점령 지배한 1000년 동안은 중국조정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베트남을 중국에 동화시키기 위해 중국의 제도 관습 문화를 현지사회에 강제적으로 이식하고자 한 시기였다. 그 이후 독립 왕조 때는 토착 왕조와 왕들이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과 경쟁에서 승리하고 외침에 대비하기 위한 정책 수립과 제도 정비를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중국의 문명을 받아들인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베트남인들이 중국문화를 선택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중국화 시도는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한다.
19세기 중반 프랑스군대가 출현하기 이전까지는 베트남은 중국의 침략과 이웃국가들과의 전쟁 위협을 종국적으로 극복해 내기는 하였지만 이를 위해 치른 비용과 희생 또한 엄청났다. 독립 왕조들은 리왕조, 쩐왕조, 후 레왕조를 제외하고는 150년을 넘기지 못하고 멸망했고, 이 세 왕조들조차도 지속적인 위기와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 국가는 재정위기 외침위협 내부분열의 위험에 끊임없이 흔들렸지만, 베트남인들의 저항의식과 정체성은 더욱 강해져갔다.
일찍이 중국 동남부에서 시작되었던 베트남왕조가 15세기 중엽 이후 중국의 위협이 약해지자 남쪽으로 눈을 돌려 주변 국가들과 지역들을 장악한 것은 역사의 패러독스라고 할 수 있다. 리왕조가 독립과 강국의 기치를 들어올려 국호인 다이비엣을 선포한 이후 200여년 동안 중부의 참파왕국과 남부의 크메르제국과 경쟁하며 전쟁을 벌였다. 결국 전자는 1471년에 완전히 사라졌고, 후자는 1757년 전략적 경제적 요충지 메콩델타지역을 베트남에 빼앗기고 말았다. 베트남의 역사와 민족형성에 한 획을 그은 이른바 남티엔 즉 남진정책의 완성이었다.
그 결과 현대 베트남의 민족 구성에서 참파왕국이 남긴 참족과 크메르왕국의 후예 크메르족은 각각 0.2%, 1.4%를 차지할 뿐이다. 대부분 킨족에 동화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베트남 민족은 이제 그 종족적 구성은 물론이고 그 염색체 지도에서도 복합적이다.
이웃과의 경쟁 속에 민족 정체성 확립
돌이켜보면 베트남의 민족적 정체성과 단결력은 외세의 위협과 이웃국가들과의 경쟁 과정 속에서 더욱 강해졌다. 식민지 이전에 이미 인구는 확대되고 영토는 확장돼 독립과 통일 이후 베트남의 국력이 급속히 신장하는 바탕이 되었다. 민족적 문화적 다양성도 그만큼 강화되었다.
강대국과의 관계, 전쟁위협에 대한 대처, 이웃국가들과의 경쟁을 목전에 두고 국론과 지역이 분열되고 정치세력과 세대가 서로 반목하는 우리에게 ‘단일민족’이란 허울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