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규 칼럼

고희 맞이한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

2024-07-16 13:00:02 게재

맨해튼프로젝트를 소재로 한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 오펜하이머는 미국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핵무기 개발은 한 국가의 최대 안보이슈이자 최고의 보안을 요구하는 일이다. 그러니 원자탄의 개발을 자국민인 오펜하이머에게 맡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원자탄 개발을 주도해 나가는 물리학자는 하나 같이 모두 외국인이다. 독일 태생의 아인슈타인을 비롯, 양자역학의 아버지 닐스 보어는 덴마크, 핵분열 현상의 전문가 레오 실라드와 수소폭탄 개발에 꽂혀 악역을 자처하는 에드워드 텔러는 헝가리, 세계 최초의 원자로를 만든 엔리코 페르미는 이탈리아, 그리고, 핵융합 이론의 최고봉 한스 베테는 독일 출신이었다.

미국인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먼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맨해튼프로젝트 에 참여하는 장면도 나오지만 영화 속에선 열심히 봉고만 친다. 그야말로 원자탄은 생산지만 미국(Made in USA)이지 제품 자체는 외국인이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제2차세계대전 전으로 시간을 거꾸로 돌려 보자. 현대물리학의 두기둥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모두 유럽의 학문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선진 유럽에서 물리학을 배우는 유학생이었을 뿐이다. 나치가 득세하고 유럽이 전화 속으로 빠져들 때 유럽 물리학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곳은 미국뿐이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들은 순식간에 원자탄을 만들어 전쟁을 종식시켰고, 미국을 과학기술의 절대 강국으로 성장시켜 놓았다. 유럽이 저물고 미국이 패권을 쥐게 되는 역사의 변곡점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유럽은 과학에 있어 여러모로 미국과 소련에 뒤쳐진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으로 건너간 수많은 석학들이 전쟁이 끝났다고 쉽사리 고향으로 돌아오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유럽의 국가들은 과학연구를 재건하고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물리학의 메카가 된 CERN

여러 논의 끝에 1951년,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UNESCO)회의에서 ‘유럽 핵 연구 위원회(Conseil Européen pour la Recherche Nucléaire)’를 설치하자는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이듬해 유럽의 11개국이 참여하는 협정서가 마련되었다. ‘쎄른(CERN)’이란 이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흘러 12개국이 참여하는 CERN이 공식적으로 설립된 것은 1954년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0년 전의 일이다.

CERN이란 이름의 첫 글자가 영어 Council에 해당하니, 우리식으로는 ‘위원회’로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CERN은 독립된 연구소 형태다. 거대한 부지 위에 수많은 건물들과 가속기가 있고, 고용된 과학자와 엔지니어가 있다. 게다가 전세계에서 몰려온 과학자들이 함께 일하니 사실상 국제공동연구소라 부르는 것이 맞다. 다른 한편으로 CERN은 바티칸처럼 국가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CERN이 국가 대 국가처럼 독립된 외교 관계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CERN에 회원국으로 가입하기 위한 협정서를 국가원수들이 서명하는 것도 이 까닭이다.

창설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CERN은 양성자 싱크로트론(Proton Synchrotron) 건설에 성공하면서 미국이 보유하고 있던 코스모트론이란 가속기보다 10배나 높은 에너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70년대에 슈퍼 양성자 싱크로트론(SPS)을 만들어 또다시 에너지를 10배 이상 높여 미국과의 격차를 넓혀 갔다. 소위 말하는 초격차를 만들어 낸 것이다.

미국은 다시 선두를 차지하기 위해 초전도기술을 도입한 새로운 가속기 테바트론(Tevatron)을 건설하기 시작했지만 가속기가 완성도 되기 전에 CERN은 SPS를 사용해 소위 W입자와 Z입자를 먼저 찾아내어 다시 한번 미국을 압도했다.

세계의 공동연구소를 꿈꾸며

CERN은 가속기뿐 아니라 소위 월드와이드웹(WWW)이란 기술을 1990년대에 선보인 것으로도 유명하다. 21세기 정보화 문명의 발상지를 CERN이라고 칭하는 이유다. 21세기 들어 CERN은 지상 최대의 가속기인 LHC를 건설하면서 전세계의 국제공동연구소를 표방하고 있다. 현재 CERN은 유럽을 넘어 이스라엘 브라질 인도 파키스탄 등도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고, 미국과 일본은 EU와 유네스코와 함께 옵저버 국가를 형성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2006년 대통령을 대신해 외교부 박원화 대사가 CERN과 연구협력협정을 체결하면서 CERN과의 교류를 시작했다.

2024년 10월 1일 CERN은 창설 70주년 행사를 개최한다. 전세계 회원국 여러 정상들이 이 고희연을 축하해주기 위해 제네바로 모여들 예정이다. 세계의 공동연구소로 문호를 개방한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도 CERN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머지않은 팔순 잔치 때는 남의 나라 잔치가 아닌 우리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잔치가 되길 바란다.

박인규

서울시립대 교수 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