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 창업자가 여덟시간 자는 까닭

2024-08-23 13:00:02 게재

제프 베이조스 “지치고 피로해 결정의 질이 떨어진다면 잠을 줄이는 게 무슨 가치냐?”

몸을 움직이고 잠을 푹 잔다. 한국에 오고 처음 맞이한 여름휴가 때 세운 원칙이다. 이번 휴식의 가장 큰 목적은 지난 6개월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6개월을 기획하는 것이었다. 귀국한 지도 어느새 반년이 지났다. 2024년 상반기는 새로운 루틴(routine)을 만들기 위해 공들였던 시간으로 요약할 수 있다.

미국 시애틀의 아마존 본사 ‘데이원’ 빌딩 앞에 있는 ‘스피어’의 모습. 400여종의 희귀식물이 사는 ‘스피어’의 별칭은 베이조스의 볼(Bezos’ Balls)이다. 2018년 완공하자마자 도시의 랜드마크가 됐다. 사진 김욱진

실리콘밸리에서 근무할 때는 출근하기 전 눈뜨면 노트북부터 챙겨 밖으로 나갔다. 눈뜨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다. 보통 오전 5시반 정도였지만 6시를 넘긴 날도 많았다.

가끔 이른 새벽에 깰 때가 있었다. 그때는 차를 몰고 테슬라 공장 옆에 있는 커피숍으로 갔다. 캘리포니아 프리몬트에 있는 스타벅스는 새벽 3시부터 문을 연다. 그 시간에 커피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테슬라 공장으로 출근하는 직원이었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미래차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느낌을 주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노동자들이 새벽부터 기가프레스 공법으로 생산된 차체를 조립하고 있었다.

한국에 오고 새벽부터 여는 커피숍을 찾고 싶었지만 녹록지 않았다. 대부분 오전 7시는 되어야 문을 열었다. 출근 준비하느라 분주한 아침이라 커피숍까지 갈 짬이 나지는 않았다. 대안을 찾아야 했다. 힌트는 2023년 3월 29일 진행된 스타벅스 창업자 하워드 슐츠의 청문회에서 얻었다.

미국 켄터키주 상원의원 랜드 폴(Rand Paul)은 슐츠에게 질문을 던지며 자신의 할아버지 사례를 든다. “대공황에서 살아남은 제 할아버지께 좋은 커피를 마시라고 권했어요. 그는 여전히 맥스웰하우스만 드세요. 3.99달러면 일주일 이상 마시기에 충분하다고요.” 분초를 다투는 아침에 원두커피 내릴 여유까지 내지 못한 필자는 동결건조 커피 가루를 병째로 사놓고 20온스 머그잔에 풀어서 마시고 있다. 한국에 와서 새롭게 만든 루틴이다.

잠은 성공한 기업가의 새로운 지위상징

미국 드라마 시리즈 ‘오피스’의 제작자이자 배우인 비제이 노박(B.J. Novak)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침을 얼마나 일관되게 시작하느냐가 중요하다(When you get started each day seems to matter less than learning how to get started consistently)”고 말했다.

베스트셀러 ‘그림 없는 그림책(The Book with No Pictures)’의 작가이기도 한 그의 조언은 아침 루틴을 만드는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됐다. 노박이 “위대한 사람들이 얼마나 일찍 아침을 시작하는지 들을 때마다 의기소침해진다”고 고백했을 때는 동질감까지 느꼈다. 무엇보다 ‘의기소침(demoralized)’이란 그의 표현에 진한 여운이 남았다. 필자 역시 무리해서 아침 기상시각을 유지하는 것보다 매일 일정한 수면시간을 확보하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덟 시간의 잠은 게으름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나온 얘기다. 25년 전 미국 주요 경제 일간지를 보자. 1999년 4월 2일 월스트리트저널이 낸 기사 제목은 ‘잠은 성공한 기업가의 새로운 지위 상징(Sleep is the New Status Symbol for Successful Entrepreneurs)’이었다.

당시 기사를 작성한 낸시 제프리가 세기말 미국의 현상을 묘사한다. “잠은 스트레스에 지친 미국에서 매우 희소한 상품으로, 새로운 지위의 상징이다. 잠은 실패자들이나 자는 것이라거나 점심은 패배자들이나 먹는다는 말은 이제 통하지 않는다. 창조적 기업가들에게 잠은 회복에 필요한 동반자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기사에서 대표 사례로 언급하는 사람은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다. 1999년이면 아마존이 창업한 지 5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다. 스타트업 딱지를 떼고 빅테크로 가는 숨가쁜 여정에서도 베이조스는 여덟 시간을 잤다. 인터넷의 미래 가능성에 인생 전부를 건 35세 창업가는 편안하고, 평화롭고, 활기를 되찾는 여덟시간 숙면을 이렇게 평가했다. “여덟시간 잤을 때 저는 보다 기민해져요. 더욱 또렷하게 생각할 수 있고요. 그저 하루 종일 기분이 훨씬 좋죠.” 25년이 지난 지금도 베이조스는 하루 여덟시간을 잔다.

아마존이 세계 최고의 전자상거래 기업이 되고 나서 베이조스는 자신에게 잠이 갖는 의미를 풀어서 설명했다. 2018년 9월 13일 워싱턴DC ‘경제클럽(The Economic Club)’과 나눈 대담에서 그는 말한다. “저는 여덟시간을 잡니다. 제가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수면이죠. 저는 잠에 대단히 진지합니다. 저는 어떤 일을 하고 보수를 받을까요? 몇가지 질 높은 결정을 내리는 일입니다. 잠을 줄이면 그만큼 결정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겠죠. 하지만 지치고 피로해져서 결정의 질이 떨어진다면 잠을 줄여서 결정의 개수를 늘리는 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2024년 포브스가 공개한 베이조스의 재산은 1940억달러다. 세계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억만장자니까 하루 여덟시간 잘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2017년 4월 8일 뉴욕타임스도 ‘잠은 새로운 지위 상징(Sleep is the New Status Symbol)’이라는 기사를 낸다. 아마존 창업자는 이 기사에 다시 등장한다.

베이조스는 사정이 어려울 때도 여덟시간을 잤다. 변변찮던 컴퓨터 프로그래머 시절에는 아예 침낭까지 챙겨서 사무실로 갔다. 기사에서 베이조스는 “창업자의 여덟시간 숙면은 주주들에게 좋은 일”이라고 단언한다. 꼭 창업자와 기업가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잠을 줄여 성공한 서사는 '과거 패러다임'

1999년 월스트리트저널과 2017년 뉴욕타임스 기사를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똑같은 제목의 두 기사를 놓고 보면 시대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1999년 미국에서 여덟시간 수면은 일부 벤처기업가의 유별난 시도로 비춰진다. 20여년이 지나고 2017년에는 누구나 충분한 수면을 확보해야 한다는 논의가 사회 전체로 확대된다.

기사 제목에서도 ‘성공한 기업가를 위한(for Successful Entrepreneurs)’이란 수식이 빠졌다. 여덟시간 숙면이 더이상 일부 테크놀로지 부호들만 누려야 하는 특권이 아니라는 뜻이다.

2017년 기사를 작성한 뉴욕타임스의 페넬로페 그린은 “잠을 적게 자는 사람들의 성공 서사는 익숙한 과거의 패러다임”이라고 분석했다. ‘허프포스트’로 이름을 바꾼 ‘허핑턴포스트’의 창업자 아리아나 허핑턴은 한발 더 나아간다. 뉴미디어를 창간하고 2년 만에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실신한 허핑턴은 깨어나서 성공을 재정의했다.

‘제3의 성공’으로 번역 출판된 베스트셀러 ‘번영(Thrive)’을 홍보하러 미국 전역을 다니며 그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단연 수면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후 허핑턴은 수면 전도사가 되었다. 잠을 주제로 ‘수면혁명(The Sleep Revolution)’이라는 다음 책을 쓸 정도였다. 허핑턴은 “과로 사회에서 가장 파괴적인 미신은 수면 부족이 일에 대한 헌신을 상징한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잠자는 회사가 생산성도 높다’며 수면을 존중하는 문화가 새로운 시대정신, 다시 말해 차이트가이스트(Zeitgeist)에 꼭 맞아떨어진다고 주장한다.

패러다임 전환과 새로운 시대정신의 발현, 거창한 용어가 연이어 등장한다. 개념보다 중요한 것은 이를 개인의 삶에서 어떻게 체화하느냐다. 제주도로 떠난 이번 휴가에서 하루 여덟시간 숙면을 취하려 애썼다. 잠을 푹 자기 위해 틈나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휴가 중 짬을 내 광주과학기술원에 가야 할 일이 있었다. 제주에서 아침 비행기를 타고 광주에 갔다가 오후에 다시 제주로 복귀하는 일정이었다.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났고 몇 시간이 붕 떴다.

수면 존중하는 문화가 새로운 시대정신

스마트폰을 꺼내 지도 앱을 열었다. 광주 첨단지구에서 광주공항까지는 버스를 타면 1시간, 걸으면 3시간이 조금 덜 걸렸다.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발걸음이 공항으로 향했다. 국내선은 출발 30분 전에만 도착해도 여유가 있다.

무더운 날씨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공항 화장실에서 여장을 가다듬기에는 시간이 충분했다. 숙소에 도착하니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샤워를 하는 둥 마는 둥 침대로 직행했다. 지난 6개월을 통틀어 그날 가장 깊이 잠들었다.

김욱진 코트라 경제협력실 차장 ‘실리콘밸리 마음산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