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억의 영국 톺아보기
영국 노동당정부, 구멍난 재정에 골머리
‘나라 곳간이 비어 있다.’ 지난달 4일 총선에서 하원 의석 650석 가운데 411석을 얻어 압승을 거둔 노동당은 저성장의 늪에서 탈출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데 여기저기에서 보수당의 유산이 발목을 잡는다.
노동당의 레이첼 리브스 재무장관은 지난달 29일 하원에서 정권교체로 물러난 보수당이 원래 예산보다 219억파운드, 약 37조8000여억원을 더 써서 정부 예산에 구멍이 났다고 발표했다. 초과 지출 액수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0.8% 정도나 된다. 돈 쓸 곳은 많지만 세수나 경제성장률은 따라주지 않아 14년 만에 어렵게 정권교체에 성공한 노동당의 어려움이 이만저만 아니다.
공무원 임금인상이 초과 지출의 절반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재무장관인 리브스는 취임하자마자 재정을 면밀하게 들여다봤다. 초과 지출한 219억파운드의 절반은 공무원을 비롯한 공공부문 근로자 임금인상에 쓰였다. 지난해 영국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7.3%다. 반면 공공부문 근로자의 임금인상은 2022년의 경우 평균 5%에 그쳤고 이 때문에 추가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간호사와 의사, 철도기관사들의 파업이 잇따랐다. 정부는 할 수 없이 지난해 최고 7%까지 급여를 올려줬다.
또 하나는 난민신청자 르완다 이송법 실행에 30억파운드 넘게 지출됐다. 영국으로 들어오는 난민 신청자를 르완다로 보내 모든 처리 절차를 밟도록 했고 영국이 이를 지원해 왔다. 영국 대법원은 안전한 국가가 아닌 르완다로 이송하는 게 위법이라고 판결했지만 보수당은 이를 끝까지 밀어붙였다. 총선을 인식해 보수층을 규합하려고 내 건 무리한 정책이다.
노동당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르완다 이송정책을 폐기했다. 국제법을 위반한다는 비판을 수용했고 아울러 곳간이 비었는데 혈세를 허투루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재무장관은 초과 지출된 예산을 메우려 대폭적인 예산삭감과 함께 각종 지원정책 폐기도 발표했다. 구멍이 난 지출의 1/4 정도를 예산삭감과 지원정책 폐기에서 메울 계획이다. 연금생활자들의 경우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겨울 난방비 보조금을 지원받았는데 이제 저소득층만 지원 받는다. 도로 신설 계획 일부가 축소됐고 요양기관 지원도 줄게 된다.
1% 못 미치는 성장률, 자본이득세 오를 듯
노동당정부는 정권 초기임을 고려해 지지도 상실을 감수하고서라도 난방요금 선별지원과 요양 지원 삭감 등 복지 지출 축소를 발표했고 시행한다. 그렇다고 경제성장률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2010년부터 14년 간 집권한 보수당이 경제를 망쳐 노동당이 집권할 수 있었다. ‘보수당이 패배했지 노동당 승리는 아니다’라는 게 이번 총선의 냉정한 평가다. 물론 노동당은 집권을 위해 중도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경제성장을 강조했고 그린벨트 규제완화 등 일부 친기업적인 공약을 제시했다.
영국 경제는 좋지 않다.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전 영국 경제성장률은 선진 7개국(G7) 가운데 꼴찌였다. 전쟁이 터진 후 러시아 천연가스에 과도하게 의존한 독일이 이런 불명예를 안았지만 영국은 계속해서 G7 중 독일에 이어 성장률이 6위에 그친다. 작년 영국 경제는 0.1%, 올해는 0.5%의 소폭 성장이 예상된다.
노동당은 일하는 근로자들의 소득을 증세없이 늘려주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세금을 내지 않던 이튼이나 해로우 같은 사립학교에 과세해 이 돈으로 공립학교 교사의 임금인상을 보전할 계획이다. 리브스 재무장관은 보수당의 초과 지출을 공개한 자리에서 이를 메울 대책을 10월 30일에 발표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증세없이 노동당의 공약을 실천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한다. 공약을 지키려면 ‘세출증액 = 세금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노동당은 풍력발전 대폭 확대 등 ‘그린 인프라’에 240억파운드(42조6000억원) 정도를 투자할 계획이다. 보수당은 원래 내연기관 자동차 판매 금지 계획을 2030년에서 5년 뒤로 연장하고 북해 원유와 가스 시추 허가도 추가로 내줬다. 노동당은 이를 원래대로 2030년으로 돌렸고 야심차게 그린 인프라를 추진하려 하지만 지출삭감만으로 부족하다. 그러기에 부자증세가 거론된다.
영국 세수 가운데 소득세와 법인세, 건강보험(NHS) 부담금, 부가세는 전체의 2/3를 차지한다. 따라서 이 가운데 한개만이라도 증세를 하면 꽤 많은 세수를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서민에게 큰 부담이 되는 이런 세금을 올리지 않겠다고 약속했기에 남은 것은 부자증세인 자본이득세뿐이다.
특히 보수당이 연속 인하한 건보료 정상화가 대상이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절반에 가까운 시민들이 무료 건강보험 서비스 개선을 위한 증세에 찬성한다. 긴급한 수술 등을 제외한 상급병원 치료 대기자수는 지난 2월 말 현재 754만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33만명 늘었다. 근로자들은 과세표준액의 12%를 건보 부담금으로 납부했는데 지난 1월부터 10%로 인하됐다. 이어 4월 6일부터 추가로 2%p 내렸다. 총선을 앞둔 보수당이 이런 무리수를 남발했다. 건보료의 잇따른 인하로 정부 세수는 100억파운드, 약 17조3000여억원이 줄어든다.
자본이득세는 주식투자로 번 돈이나 임대용 부동산 수익 등에 대한 세금이다. 주식투자 이득 기본세율은 10%, 부동산 임대소득 기본세율은 18%다. 노동당은 선거공약에서 사모펀드에 대한 자본이득세를 언급했을 뿐이다. 사모펀드 매니저들의 보너스는 자본소득세로 간주되는데 아직까지 면세였다. 그런데 이를 자본소득세로 징세해봤자 1년에 5억6500만파운드 정도의 세수만 더 거둘 수 있을 뿐이다.
지나치게 낮은 자본이득세의 기본세율을 소득세 수준으로 맞춘다면 연간 추가로 최대 160억파운드의 세수가 증가한다. 지난해 거둔 자본이득세보다 10억파운드 더 많다.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런던 부동산시장에 고액의 주택이 매물로 많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노동당 집권 후 자본이득세 증세를 우려한 사람들이 미리 주택을 팔아 재테크에 나선 것이다.
EU와 관계 개선, 경제성장률 제고에 도움
영국 경제가 이처럼 저성장에 빠진 것은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가 큰 몫을 했다. 영국 교역의 절반 정도를 차지했던 EU에서 탈퇴했지만 이를 만회할 대체 시장 개척은 요원하다. 영국의 두번째 교역상대국 미국과의 무역은 EU의 1/3에 불과하고, 미국과는 아직까지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지 못했다.
또 영국에 들어오는 외국인직접투자(FDI)는 2016년 6월 말 브렉시트 국민투표 후 차차 줄었다. 다국적 기업들은 인구 6600만명의 영국 시장만을 보고 투자한 것이 아니라 영국 시장을 EU에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활용했다. 그런데 브렉시트 후 이런 이점이 사라져 버렸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브렉시트가 잘못된 결정이라는 대답이 그렇지 않다는 의견보다 20%p 높다. 하지만 EU 재가입은 요원하다. 지난 5월 설문에 따르면 노동당 지지자들의 85%가 EU 재가입을 지지하지만 보수당원들은 23%만 지지할 뿐이다. 이처럼 정당 지지에 따라 극과 극의 입장이어서 노동당조차 EU와의 관계개선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스타머 총리는 취임 직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을 만나 EU와의 관계개선 의지를 드러냈다. 영국과 EU는 우크라이나 지원과 대러시아 강경정책에 동의한다. 영국은 EU와 기후위기를 포함한 포괄적인 안보협력의 틀을 논의중이다. 보수당이 반대할 수 없는 분야에서 EU와의 협력을 조금씩 확대할 듯하다. EU와의 관계를 개선하면 영국 경제성장률 제고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국내 정치적 어려움 때문에 매우 제한적인 분야에서 점차 협력을 꾀할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영국의 경제성장률 올리기와 이에 따른 재정 메우기는 다양한 장애물에 직면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