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현장 리포트
해리스,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 외면…대선에 득될까
8월 19일부터 22일까지 나흘 동안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대선후보로 선출하면서 막을 내렸다. 민주당 출신 전현직 대통령들을 비롯 수십명의 저명한 민주당 인사와 유명인사들, 심지어 일부 공화당 정치인들까지 무대에 올라 해리스 후보에 대한 지지 연설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단결과 화합을 과시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소외된 그룹이 있다. 이스라엘의 가자 전쟁에 반대하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들이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소외된 아랍계 미국인
전당대회에 참석한 민주당 대의원 30명은 이른바 ‘지지하는 후보 없음(Uncommitted)’ 운동을 이끌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스라엘 군사행동 지원에 대한 항의로 지지 후보가 없다고 투표하는 ‘언커미티드 운동’은 지난 2월 미시간주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그후 이 운동은 전국으로 번져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과정에서 70만 표 이상을 얻어 30명의 대의원을 확보했다. 이 대의원들이 민주당 지도부에게 전당대회 메인무대에서 발언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마스에 인질로 잡혀있는 미국인 청년 허쉬 골드버그-폴린의 부모는 전당대회 셋째날인 8월 21일 무대에 올라 자신들의 입장을 밝혔다. 언커미티드 대의원들은 이스라엘 인질가족들이 메인 무대에서 연설을 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그 결정에 대해 강력히 지지를 표명했다. 동시에 1948년 이후 가장 많은 민간인 사망자수를 내고 있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입장 또한 들을 수 있기를 강력히 희망한다고 밝혔지만 끝내 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공화당원들조차 연사로 무대에 올랐지만 친팔레스타인 목소리는 해리스 선거캠프와 지도부에 의해 묵살된 것에 대해 비판의 소리가 커지고 있다.
언커미티드 운동이 연사로 제안한 사람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계 미국인이자 조지아주 하원의원 루와 로만이다. 그는 “민주당이 당원이자 주의원으로 선출된 나는 거부한 반면 전 조지아 부지사인 제프 던컨 등 공화당 인사들은 무대에 올라 박수를 받았다. 나 개인이 아닌 팔레스타인 사람들 전체가 당에게 의미 없는 존재라는 느낌을 받았다”며 지도부에 대한 유감을 표현했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친팔레스타인 발언이 나오는 것을 막은 건 민주당이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노사이드(민간인 대학살) 문제 해결에 근본적으로 관심이 없다는 신호라는 비판이다. 또한 해리스 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 것이기도 하다. 이번 전당대회가 친팔레스타인 유권자들을 무시한 유일한 사례가 아니라는 점 또한 지적되고 있다. 예를 들면 8월 초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유세에서 해리스 부통령은 연설 도중 친팔레스타인 시위대가 “우리는 제노사이드에 투표하지 않을 것”이라는 구호를 외치자 확연하게 짜증을 내면서 “트럼프가 당선되길 원한다면 그렇게 말하라”고 일축했다.
또한 해리스는 후보 수락연설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재차 확인하며 자신의 정책이 바이든 대통령의 정책과 다르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그의 전∙현직 보좌관들도 해리스의 대(對) 이스라엘 정책이 현정부의 정책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해리스 부통령이 상원의원으로 활동할 때 그의 국가안보 보좌관이었던 헤일리 소이퍼는 “해리스가 미국-이스라엘 관계의 확고한 지지자”라면서 “바로 그게 미국의 국가안보 이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해 10월 하마스의 공격 이후 시작된 이스라엘의 보복 공격으로 지금까지 4만명의 가자지구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무고한 어린이와 여성이다. 의료진들에 의하면 가자 어린이들은 봉쇄로 인해 심각한 기아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방장관은 “우리는 인간 동물과 싸우고 있고, 우리는 그에 따라 행동한다”면서 이스라엘 군의 민간인 대학살 (제노사이드)을 정당화했다. 심지어 이스라엘 대통령 아이작 헤르조그는 “가자에는 무고한 민간인이 없다”고 단언했다.
이런 비인도적인 학살의 배후에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단적으로 미국이 제조, 지원하는 폭탄이 팔레스타인 민간인 학살에 쓰이고 있다. 그 결과 지난 10개월 동안 가자지구 전체 인구의 약 2%가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가 대세였던 무슬림 아랍계 시민들이 바이든 정부에 배신감과 실망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전쟁반대 목소리 차단 역효과 부를 수도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민주당 지도부는 전당대회에서 가자 전쟁을 언급하는 것이 당의 단결을 흔들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억누른 것이 도리어 역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8월 21일 발언 기회가 없다는 것을 통보받은 ‘지지후보 없음’ 운동 대의원들은 이에 항의해 컨벤션 홀 밖에서 연좌농성을 벌였다. 또한 ‘해리스-월즈를 위한 무슬림 여성들’이라는 지지 그룹은 전당대회에서 팔레스타인계 미국인 연설자가 없을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 그룹 해체를 결정하고 해리스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들은 성명서에서 “오늘 밤 무대에 오른 이스라엘 인질의 가족은 당 후보나 전당대회가 지금까지 보여준 것보다 팔레스타인계 미국인과 팔레스타인인에 대해 더 많은 공감을 보여주었다”면서 “이것은 민주당원들에게 보내는 끔찍한 메시지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에 관해 말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더 큰 우려는 이번 전당대회에서 나타난 것처럼 바이든정부의 이스라엘 지원이 당내 갈등과 논쟁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수많은 아랍계 미국 시민들이 바이든 정부와 민주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랍계 미국인들은 전체 인구의 약 1% 남짓한 350만명에 불과하지만 이들 중 많은 수가 미시간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등 경합주에 살고 있다. 선거인단 선출이라는 미국 선거제도의 특성상 경합주에서 공화 민주 어느 당이 승리하느냐에 따라 선거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의 민심이 선거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 지난 대선에서 바이든은 경합주인 미시간과 펜실베이니아에서 각각 2.8%p와 1.2%p라는 근소한 차이로 신승했다. 미시간주의 경우 아랍계와 무슬림 유권자들의 약 69%가 바이든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모두 노골적인 인종주의자인 트럼프 지지로 돌아서지는 않는다 해도 기권을 하거나 아니면 제3의 후보를 지지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번 대선에서 아랍계 유권자들이 민주당 지지에서 대거 이탈할 경우 경합주에서 민주당이 패할 가능성이 있다.
해리스, 바이든정부와의 차별화 기회 놓쳐
지난해 전쟁이 시작된 직후 실시된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대선에서 바이든을 지지하겠다고 응답한 아랍계 미국인은 고작17%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경합주인 미시간주에서는 지난 2월 민주당 경선 투표 당시 출구조사에서 아랍계 미국인 투표자 10명 중 9명 이상이 ‘지지 후보 없음’에 투표했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자였던 이들이 바이든정부에 큰 배신감을 느끼고 돌아서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다. 마찬가지로 아랍계 미국인뿐 아니라 일반 미국인 대다수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전쟁에 반대하고 있다.
가자지구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대에게 ‘학살자 조 (Genocide Joe)’라고 불리는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 포기를 선언하고 나서 해리스 부통령은 바이든정부의 정책과 차별성을 보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번에도 언커미티드 운동 대의원들이 전당대회에서 발언 요청을 함으로써 해리스 부통령이 바이든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를 제공했다. 하지만 해리스 선거캠프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 이 일이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날지 아니면 후폭풍으로 돌아올지는 11월 대선 결과 이후 분명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