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탁 칼럼

식물 방통위가 주는 역설

2024-09-02 13:00:05 게재

집권에 성공한 정치권력은 늘 방송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여기에 보수와 진보 정권의 차이는 거의 없다. 방송을 손에 넣었으면 하는 그 굴뚝같은 마음을 가슴에 품고만 있지 않고 과감하게 실행에 옮기는 것까지도 다를 바 없다. 일이 조용히 진행되면 좋겠지만 여의치 않아 파열음이 나오더라도 권력은 기꺼이 감수한다. 정권을 유지하는데 방송은 그만큼 중요한 도구라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권력은 취임 초부터 방송 재편을 위한 모종의 수를 동원하고 전방위적으로 작전을 벌여 끝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이를 두고 여권은 ‘방송의 정상화’라고 표현하고 야권은 ‘방송 장악’이라고 비판한다. 여당이 야당 되고 야당이 여당 되는 정권교체가 몇 차례 있었지만, 여당일 때 ‘정상화’를 외치던 세력이 야당이 되어선 ‘장악’이라며, 또 그 반대 입장에서 앙앙불락하는 데칼코마니 같은 패턴은 변한 적이 없다.

그런데 정권 잡은 세력이 방송을 ‘정상화’시키겠다며 동원하는 모종(某種)의 수라는 게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언론계 뉴스를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 챌 정도의 전형적 수법, 즉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정권 편향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KBS와 MBC, EBS 등 공영 방송 3사는 기본적으로 여권 우위의 지배구조다. KBS 이사 11명은 여야 7대 4,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9명은 여야 6대 3의 비율로 구성하는 게 그동안의 관례이기 때문이다. EBS 또한 교육부와 교육단체 추천 인사를 포함하긴 해도 여야 6대 3의 구조는 마찬가지다.

관련 법규에 여야 비율에 관한 언급은 어디에도 없고 ‘각 분야의 대표성’을 감안하도록 돼 있지만 정치권이 이 비율을 지켜왔다는 건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걸 고상한 말로 방송의 정치 후견주의, 쉬운 말로는 정치권 나눠먹기라고 하는데 무엇이 되었든 공영방송의 뿌리를 좀먹는 병폐가 아닐 수 없다.

‘방송 정상화’와 ‘방송 장악’ 악순환

고질병이 도드라지는 건 여야가 뒤바뀌는 정권교체 이후다. 정권의 임기는 5년이고, 공영방송 이사 임기는 3년이다.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어느 날 여권 추천 이사들은 가만히 앉은 채 야권 추천 사람으로 입장이 달라진다. 여권 우위의 이사회는 졸지에 야권 우위로 변한다. 이걸 애초 관례대로 여권 우위로 돌리려면 현직 이사들 임기 만료 후 새로 이사진을 구성하면 되지만 대개 정권은 이 기간을 참아내지 못하고 당장 손 대고 싶어 한다.

구 여권, 그러니까 새 정권 들어 야권 쪽 사람이 된 이사 중에서 2명만 찍어서 강제로 밀어내고 그 자리를 여권 사람으로 채우면 이사회 구조는 여권 우위로 역전된다. 그 뒤엔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서라도 현 사장을 해임하고 새 사장을 선임한다. 방송 정상화 또는 방송 장악은 이렇게 완성된다.

얼마 전 대통령 직속 기구인 방송통신위원회가 이진숙 위원장 취임 첫날 위원장과 부위원장 2인 만으로 공영방송 이사 선임(추천) 작업을 뚝딱 해치운 것도 정권의 ‘방송 내 편 만들기’ 작전의 일환이다. MBC 사장을 갈아치우기 위해 방문진 내 야권 이사를 중도 해임하려던 지난해 1차 작전은 불발에 그쳤다. 이번에는 이사진 임기가 일제히 만료되는 만큼 여권 우위의 새 이사진을 구성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일사천리로 진행될 것으로 내다본 것이다.

하지만 뜻밖의 법원 결정이 내려지면서 이 2차 작전은 참담한 실패로 돌아갔다. 방통위는 법률에 따라 여야 3대 2의 비율, 5인으로 구성되는 합의제 기구다. 그런데 여권 2인만으로 공영방송 이사 선임 같이 중요 사안을 의결하는 것은 적법성에 문제가 있으므로 일단 무효라는 게 이번 서울행정법원 결정의 요체다.

방통위가 왜 2인 체제가 되었는지 연유를 살피는 것은 꽤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므로 여기선 생략하자. 중요한 건 새 이사진 구성이 불가능해지면서 임기만료된 야권 이사들이 법률에 따라 직무를 계속한다는 점이다. 이는 정권의 구상과는 정반대로 야권 우위의 MBC 지배구조가 기약 없이 지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운 털 박힌 방송사 하나 잡으려고 무리수를 두었다가 그게 자충수가 되어 돌아오면서 게도 구럭도 다 놓친 꼴이 된 것이다.

‘방송 내편 만들기’ 방정식 유효하지 않아

이번 법원 결정이 항고심에서 뒤집히지 않는 한, 정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방통위를 5인 체제로 정상화해 이사진 임명을 다시 하는 길 뿐이다. 하지만 이진숙 위원장은 탄핵 소추되어 직무정지 되어있고, 여야는 방통위원 공석 세 자리를 두고 고도의 정치적 수싸움에 몰두해 있는 모습이다. 가까운 시일 내 5인 정상화는 기대난망이다.

중요 국가기관인 방통위가 식물 상태에 놓인다는 건 여야 정파를 떠나 나라의 불행이다. 그래도 굳이 위안을 삼아보자면, 이번 일이 정권의 ‘방송 내 편 만들기’ 성공 방정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걸 보여준 첫번째 기념비적 사건이라는 역설이다.

신한대 특임교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