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시론
커지는 블랙아웃 공포
냉방수요 급증으로 지난 8월 한달 동안 전력수요가 역대 최고 기록을 세번이나 갈아치웠는데도 대규모 정전사태(블랙아웃) 없이 무사히 고비를 넘겼다. 전국 각지에서 전력 과부하로 인한 시설물의 자체 변압기 이상으로 많은 정전사고가 발생하기는 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대규모 정전사태는 없었다.
블랙아웃은 위기가 지났다고 생각했을 때 발생하는 경향이 있다. 2011년 9월 15일 블랙아웃도 한여름이 아니라 늦더위 상황에서 일어났다. 겨울철 전력성수기에 대비, 일부 발전소가 정비에 돌입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덮친 무더위와 전혀 예상치 못한 일부 발전소의 고장이 겹치면서 공급이 수요에 미치지 못하게 되자 대규모 지역별 순환 정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올해도 9월 기온이 평년보다 높을 확률이 첫째주 60%, 둘째주 40%나 된다. 이에 따라 산업통상자원부는 애초 9월 첫주부터 돌입할 예정이던 7개 발전기 정비를 1~2주 순연시키기로 했다. 만일에 대비해 공급능력을 2GW 이상 추가 확보, 예비력을 10GW 이상으로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10년간 발전설비 55% 증가했으나 송전선로 9% 증가에 그쳐
전력소비는 이상기후로 인한 냉난방 수요와 첨단산업체 등장 등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특히 현재 건설중인 세계 최대 규모의 수도권 남부 반도체 클러스터는 2030년부터 순차적으로 가동에 들어가 2050년엔 10GW의 막대한 전력수요가 예상되는 등 전력 의존도는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블랙아웃의 핵심은 전력 수요 공급의 불일치다. 전력시설용량 자체가 부족한 것도 문제지만 시설용량이 충분하다고 해도 안심할 수 없다.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인 ‘사용후 핵연료’를 더 이상 보관할 장소가 없어 원자력발전소 가동이 불가능해지거나 송전선로가 부족할 경우 언제라도 블랙아웃이 발생할 수 있다. 역대 최대 전력수요를 기록한 지난달 20일에도 동해안의 7개 석탄 화력발전소는 전력 수송망 부족으로 설비용량 6.4GW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3.0GW를 발전하는데 그쳤다.
우리나라의 주요 발전설비는 지방에 있다. 반면에 수요는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2023년 기준으로 수도권은 전체 전력의 40.2%를 쓰지만 생산은 27.4%에 불과하다. 그래서 수도권에서는 부족한 전기를 지방에서 끌어다 써야 한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국내 발전설비는 55% 증가했으나 송전선로는 9% 늘어나는데 그쳤다. 이로 인해 수도권에서 ‘전력대란’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36년까지 56조5000억원을 투입, 동해안과 서해안의 각종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으로 보내는 송전설비를 확충할 계획이다. 그러나 주민들과 환경단체의 반대와 한국전력의 엄청난 적자로 인해 전력망 건설이 지연되고 있다.
현재 동해안 지역의 발전 시설용량은 총 17.9GW나 송전 가능량은 10.5GW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강원 지역 석탄 화력발전소 5곳이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있다. 오는 2026년까지 8GW 규모의 동서 방향 ‘전기 고속도로’가 가동되지 못하면 울진에 건설될 신규 원전인 신한울 3, 4호기의 전력망 연계도 어려워질 수 있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설비가 집중되고 있는 제주 및 호남 지역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호남 지역의 계통 불안은 전력 당국의 골칫거리다. 호남 지역에서는 태양광 발전소 증가 등으로 지역 내 전력수요보다 많은 전력이 생산되고 있어 최근 들어 잉여 전력생산을 줄이기 위한 출력제어가 빈번해지고 있다.
변동폭 큰 신재생에너지 설비 확대도 전력수급 불안 한몫
이런 와중에 경기 하남시가 최근에 전자파를 우려한 지역 주민들의 반대를 이유로 동해안과 수도권을 잇는 전력망의 핵심 시설인 동서울변전소 옥내화 및 증설 사업안을 불허했다. 동서울변전소는 경북 울진 한울원전 등 동해안 지역 발전 전력을 수도권으로 끌어오는 동해안-수도권 초고압직류송전(HVDC) 송전선로의 2단계 접속지점이다.
또한 기업들의 RE100 수요에 턱없이 모자란 신재생에너지 발전설비의 확대로 전력수급 불안정이 심화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예컨대 발전량이 들쑥날쑥한 전국의 태양광 설비는 약 31GW인데 이상기후로 인해 태양광 이용률이 10%포인트 낮아질 경우 단순 계산으로 전력 예비력이 3.1GW 감소한다. 태양광 설비용량이 증가할수록 예비력 변동폭도 커지게 돼 전력 수급 불안정은 더 심화할 것이다.
박현채 본지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