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전 칼럼
다시, 자유를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 다시 ‘자유’라는 기본권 침해가 쟁점이 되고 있다. 특히 신체의 자유와 언론ㆍ출판의 자유가 훼손되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심각하다. 법조계와 언론계에 광범위하게 확산하고 있다. 법조인이 ‘법기술자’, 기자가 ‘기레기’로 조롱당하는 현실이 그것을 반영한다. ‘자유’에 대한 개념도 보수와 진보진영이 각자 제멋대로 쓴다. 그렇지만 어디에서도 진지한 담론은 들을 수 없다. 인권이라는 본질적 문제에 대한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을 보며 생각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법률이 정한 범위 내에서 구속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영어 표현을 보면 좀더 정밀하게 구분한다. 프리덤(Freedom)과 리버티(Liberty)다. 프리덤은 보통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능력으로 쓰인다. 어떤 힘 앞에서도 마음먹은 대로 행위를 감행할 수 있는 힘(The power to do)을 의미한다. 반면 리버티(Liberty)는 인간에 대해 외부로부터 억압이나 속박이 없는 상태를 묘사할 때 주로 쓰인다.
역사의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자유(프리덤), 그 ‘의지’가 인간을 구속하는 억압의 굴레를 끊었다. 유럽의 시민혁명이 그것이다. 자유는 중세 봉건시대의 왕과 귀족, 소위 양반과 관리(官吏)들만 누리는 특권이었다. 이 특권을 타파했다. 만민이 평등하게 누리는 권리로 만들었다. 자유를 쟁취한 주체는 시민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혁명의 도화선이다. 여기에는 시민이 주권자라는 ‘민주’ 개념이 자리 잡고 있다. ‘자유’가 국민이 스스로 주인의 자리를 찾아가는 민주라는 주권(主權) 사상의 씨앗이다. 달리 말하면 ‘자유’의 모태(母胎)는 민주(民主)인 셈이다.
‘자유’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된 인권이다. 그로부터 싹튼 것이 18세기 자연법사상이다. 자연 그 자체가 인간의 본성임을 뜻한다. 인간은 하늘로부터 태어날 때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천부인권(天賦人權)이다. 자연법사상은 존 로크(John Locke)와 루소(Jean Jacques Rousseau)가 주창했다. 세상의 어떤 통치제도나 법도 천부인권인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권력의 억압 해체하면서 성장·발전
자유의 충돌을 관리하는 것이 공권력(公權力)이다. 하지만 시민의 자유를 일방적으로 침해하는 권력의 행사는 정당화될 수 없다. 공권력의 한계선이다. 이 한계선을 놓고 권력과 시민이 벌여 온 줄다리기 싸움이 민주주의 역사다. 자유와 민주가 일체로서 억압에 대해 저항을 거듭하며 동시에 성장·발전해왔다. 자유는 민주라는 모태에서 태어났지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 했다.
자유와 민주의 투쟁 역사는 권력의 억압을 해체하는 것으로 출발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경제적 부와 사회적 복지를 아우르는 평등한 배분으로 확장되었다. 인간의 천부인권인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에 법과 제도라는 도구를 활용했다. 국가 공동체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국가 조직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가권력을 오직 자유와 평등의 천부인권을 지키는 장치로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태어난 것이 국가권력을 입법·행정·사법으로 구분한 ‘삼권분립주의’다. 통치권력을 삼분해 서로 독립적으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게 한다. 자유를 보장하고 권력의 남용과 타락을 예방하는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제도다. 삼권분립의 자유민주주의는 헌법과 법률로 자유 보장을 규정했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보편적인 법률적 자유보장제도이다. 그 시작은 신체의 자유부터다. 더불어 언론·출판·결사, 거주, 직업 선택, 신앙과 양심의 자유 등으로 확장되고 있다.
법이 강자를 위한 수단되는 것은 금기
우리나라도 헌법 12조부터 34조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한다. 그렇지만 헌법과 법률이 있다고 국민이 자유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자유’가 법의 이름으로 도전받고 있다. 자유를 강조하면서 법의 공정과 평등은 훼손하는 현실이다.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다. 법의 생명력은 공정성에서 나온다. ‘만인평등의 원칙’이 무너지면 법은 힘을 잃게 된다. 인권만 침해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도 정당성을 잃고 추락한다.
법의 제정(입법부)과 집행(행정부), 공정과 형평의 판단(사법부)에 이르기까지 본질을 놓쳐서는 안된다. 법은 기교로 다루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유희를 위한 전유물은 더욱 아니다. 법이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동원된다면 그것은 총칼보다 더한 폭력이자 야만이다. 때문에 ‘법이 강자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은 금기다. 두려움으로 법치에 임해야 한다. 자유의 기원, ‘만인 평등’이 무너지고 있다.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를 다시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