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흑백 정치와 비빔밥
이른바 ‘먹방’은 시청률 보증수표이다. 최불암씨가 입맛을 다시던 ‘한국인의 밥상’은 어느덧 13년째 롱런하고 있다. 지난 10일부터 3인 진행체제로 개편됐지만 만화 ‘식객’의 작자 허영만씨는 6년째 ‘백반기행’ 중이고. 나영석PD의 스타성을 확인해 준 ‘삼시세끼’ 첫 방송이 2014년 10월 17일이다. 딱 10년 됐다. 그동안 산촌 어촌을 거치더니 지난달 미스터트롯 임영웅을 게스트로 ‘삼시세끼 라이트’가 새 시즌을 시작했다.
먹방은 지상파 케이블 홈쇼핑 유튜브 등 매체를 가리지 않는다. ‘먹고 보는 아이들’은 대만 태국의 맛집을 찾아다니고, 홈쇼핑은 구독자 900만명 유튜버와 콜라보로 먹방 생방송을 진행한다. 뭐니뭐니 해도 먹방의 최대 수혜자는 ‘골목식당’의 백종원씨, ‘냉장고를 부탁해’의 최현석 요리사가 아닐까.
그 백종원씨와 최현석씨가 출연한 ‘흑백요리사’가 화제다. 내로라하는 스타 셰프 20명과 도전자 ‘흑수저’ 80명이 요리 솜씨를 겨루는 구성이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지 한달인데 출연자들의 식당은 연말까지 예약이 꽉 찼다고 한다. 1등을 차지한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씨의 디저트는 대형 편의점의 메뉴로 자리잡았다. 그의 인스타그램은 팔로워가 22만명을 넘었다. 2등을 한 ‘백악관 셰프’ 에드워드 리도 굴곡진 인생 스토리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비빔밥이 가장 한국적 음식인 이유
수많은 요리 중에서도 한식과 비빔밥에 눈이 갔다. 마침 전주시가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에 비빔밥 등재를 추진한다고 지난 10일 발표한 터다. 특히 ‘장사천재 조사장’이란 닉네임을 쓴 요리사가 선보인 ‘고추장 없는 비빔밥’은 신선했다. 비빔밥에 고추장이 없다니. 조갯살과 새우살을 다져 양념으로 한 ‘하얀 비빔밥’이다.
사실 전주비빔밥 외에도 진주 마산 통영 평양 해주비빔밥이 있다. 내용물을 강조한 꼬막 닭 멍게 산채비빔밥도 있고. 고추장 대신 간장을 쓰는 경우도 많다. 그러면 비빔밥의 대명사 전주비빔밥의 전형은 어떤 모습일까. 그릇도 놋쇠와 돌솥으로 나뉘고 나물도 각각이다. 고명도 오방색에 따라 전후좌우 배치하는지, 중심에 노른자만 놓는지, 육회를 쓰는지 식당마다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임실)콩나물과 (순창)고추장 아닐까.
‘흑백요리사’에서는 전주에서 비빔밥집을 운영한다는 요리사가 심벌즈 그릇에 밥으로 ‘BIBIㅁ’이라 쓰고 드럼 장단에 맞춰 고추장을 비비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 통영식 하얀 비빔밥이 통과됐다. 관심을 끈 것은 에드워드 리의 ‘인생 요리’ 비빔밥이었다. 그는 혼돈스런 자신의 정체성을 상징한다고 했다.
나물과 고명을 비벼 밥으로 둥그렇게 감싸고 이를 기름에 튀긴다. 다음에는 참치로 둘러 싸더니 장식을 얹는다. 심사위원이 물었다. “어떻게 비벼 먹죠?” 그는 “칼로 잘라 포크로 먹으면 된다”고 했다. 심사위원은 “비비지 않는데 어떻게 비빔이냐”고 했다.
그렇다. 비빔밥은 비벼져 나오는 게 아니다. 입맛에 맞게 스스로 비벼야 하는 거다. 대체로 숟가락으로 쓱쓱 비비지만, 더러는 젓가락으로도 비빈다. 숟가락은 고추장을 밥과 나물에 균질하게 발라 맛이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다는 거다. 젓가락은 고추장을 들쑥날쑥 발라 먹을 때마다 미묘하게 맛 차이가 난다는 거다. 어쩌면 미감유창(美感遊創)을 가미한 비빔 음식의 본령이라고 할까.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이 2021년 국민의힘 대표가 됐을 때 “다양한 사람이 샐러드볼에 담긴 각종 채소처럼 고유한 특성을 유지한 채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강조했다. 인종과 문화가 제각각 다른 이민자의 나라 미국 특성을 반영한 사회론이다. 하지만 샐러드볼 대신 비빔밥을 예로 드는 편이 좋았겠다.
각양각색 나물과 고명과 밥이 우리네 얼로 상징할 수 있는 빨간 고추장을 매개로 한데 비벼져 가장 한국적인 음식이 된다. 다양한 종교가 혼재하고 정치경제와 사회에 대한 인식이 흑백처럼 나뉘어도 한민족 특유의 면면한 정한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민주화를 쟁취하고 외환위기를 극복했다.
비빔밥에서 중요한 것은 밥이다. 민심은 천심이고, 밥이 하늘이라 하지 않나. 이러한 밥에 얹혀지는 갖은 나물은 그 위에 형형색색 가미된 고명이 섞이고 비벼져도 본디의 풍미를 잃지 않는다. 고사리와 콩나물처럼 색깔이 달라도, 도라지와 시금치처럼 식감까지 달라도 민중이라는 밥에 고추장으로 붙어 어우러지는 거다.
평화와 공존 위해 남남 남북도 비벼야
그렇지 않아도 갈라지고 쪼개진 정치인데 남북마저 패인 골이 넓게 벌어지고 있다. 무인기와 오물풍선이 날아다니더니 남북을 잇는 철도와 도로가 폭파됐다. 아연 한반도에 긴장감이 감돈다. 햇볕도 사라지고 달빛도 스러진 캄캄한 어둠 속에서는 자칫 부싯돌 하나가 치명적인 오인과 오판을 초래할 수 있다.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는 부대껴야 한다. 눈 흘기고 을러대면 결국 공멸의 길에 서게 된다. 남남도 남북도 그렇다. 샐러드볼이 아닌 비빔밥 민족이다. 단심(丹心)과 진심이 담긴 대화로 잘 비벼 보자. 다행히 훗날 가슴을 쓸어 내리도록 말이다.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