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탁 칼럼
대통령의 근거 없는 자신감
윤석열 대통령은 현 시국을 심각한 위기상황으로 인식하고 있는 걸까? 정권의 기반을 뿌리째 흔드는 정도의 메가톤급 사건이 연일 터져나오는 상황에서 대통령실의 안일한 대응 모습을 지켜보면 이런 의문이 강하게 든다.
윤 대통령이 처한 정치환경은 이미 최악에 가깝다. 명태균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대통령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세간에서 손가락질 받는 조롱의 대상이 돼 버렸다. 퍼스트레이디로부터 ‘무식하고 철없는 우리 오빠’ 소리 듣는 대통령이 됐으니 정치든 정책이든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국회는 야당 손에 있고 나라 경제는 침체의 늪에 빠져 있다.
여론은 더 이상 나빠질 수 없을 만큼 나빠진 상태다. 그의 5년 임기는 이제 겨우 절반을 지나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아직 절반이나 남았다니” 하며 속상해한다. 매주 조사 발표되는 대통령 지지율은 갈수록 떨어지더니 어느새 탄핵 전 박근혜 대통령 수준으로 추락했다. 이제 대통령 이름이 포함된 기사 뒤에는 ‘하야’ ‘탄핵’ ‘퇴진’ 운운하는 댓글이 공식처럼 따라 붙는다. 역풍을 우려해 조심스러워하던 제1야당에서도 탄핵을 입에 올리는 데 거침이 없다.
여권에서는 어떻게든 대통령과 거리를 두려 한다. 집권여당은 대통령 지지율과 여당 지지율이 따로 움직인다는 사실에 그저 위안을 얻을 뿐이다. 한때 둘도 없는 동지였다가 지금은 불구대천의 관계가 된 여당대표는 대통령 면전에서 대통령이 진짜 듣기 싫어하는 ‘국민 눈높이’를 언급한다. 보수 진영에선 이러다 진짜 정권이 날아가는 건 아닐까 초조해 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진보언론보다 보수언론이 더 자주, 더 매섭게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를 비판한다. 다 같이 망하지 않으려면 읍참마속이라도 하길 바라는 것이다.
자해행위에 가까운 대통령 메시지 관리
사방을 둘러봐도 대통령 편은 안 보인다. 그런데 정작 윤 대통령은 이상하리만치 별 흔들림이 없다. 여전히 국회를 향해 고압적이고 독불장군처럼 돌 맞으며 가겠다고 한다. 매사 별 일 아니라는 듯 별 일이야 있겠느냐는 식의 태도에서 큰 변화가 없다. 아직도 모든 걸 압수수색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믿는 걸까? 아니면 무슨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일까.
윤 대통령의 시국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최근 한동훈 여당 대표와의 차담(茶談) 파문이다. 대통령은 이날 한 대표의 독대 요청을 무시하고 비서실장을 동석시켜 2대 1 자리를 연출했다. 이것부터 의도는 충분히 읽히지만 놀라운 것은 사후에 내놓은 사진이다.
요즘 대통령실에선 언론의 취재활동을 상당 부분 통제한다. 기자 접근을 차단하고 내부에서 ‘전속 취재’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직접 촬영한 뒤 언론에 배포한다. 그러니까 여론의 도마에 오른 문제의 사진, 즉 대통령이 여당대표와 비서실장을 나란히 앞에 앉혀놓고 양 팔을 뻗어 테이블을 짚은 채 잔뜩 화난 표정으로 무어라 질책하는 것 같은 모습의 사진은 기자들의 취재의 산물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통령실 직원이 찍고 대통령실 차원에서 거르고 고른 대통령 픽(pick)이다. 대통령이 당 대표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며 혼내주는 모양새를 의도적으로 만들어 만천하에 보여주고 싶어 했다는 뜻이다.
작금의 정치상황을 위기로 인식했다면 나오기 어려운 발상이다. 위기상황에선 위기관리가 최우선이고 그 핵심은 이미지 관리다. 경위야 어떻든 여당 대표와 만났다면 당정 화합의 이미지를 연출해 최소한 여권의 이해관계자들만이라도 안심시켜주는 게 정치적 위기관리의 기본이다.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 자기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상대를 모욕주는 행동은 정치 지도자라면 해서는 안될 자해행위나 다름없다.
대통령실이 위기관리에 무신경하다는 걸 보여주는 또 다른 정황은 말바꾸기다. 위기관리는 사전예방이 최선이지만, 일단 상황이 발생하면 신속하고 일관성 있는 메시지로 대응해 신뢰 회복에 나서는 게 차선이다.
명태균 사건이 터지면 명씨 리스크의 본질을 신속히 파악해 위기강도에 따라 해명할 건 해명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고, 희생할 건 희생해 가면서 위기를 넘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명씨 주장이 나올 때마다 서로 다른 익명의 관계자가 나서 이리저리 말했다가 모순으로 드러나 곤욕을 치른다. 위기국면에서 ‘메시지 번복’은 희미한 신뢰 자산마저 다 까먹는 자살골이다.
‘더닝 크루거 효과’에 기인한 자신감인가
심리학에서 인지편향을 설명하는 용어로 ‘더닝 크루거 효과’라는 게 있다. 미 코넬대의 더닝과 크루거 두 연구자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실패를 해도 실수를 인식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윤 대통령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 더닝 크루거 효과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그게 아니라면 위기를 위기로 엄중하게 인식하고, 특단의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는 용기가 대통령에게 필요한 시점이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