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권 칼럼

특검에 가려진 진짜 위기

2024-11-14 13:00:08 게재

저잣거리 쇼는 행인을 불러모은다. 좌중은 쇠사슬 끊는 차력시범에 입을 쩍 벌리고, 입에서 불을 내뿜으면 탄성을 터뜨린다. 막간은 약장수 시간이다. 세상에 공짜 구경은 없다. 정신줄을 놓으면 만병통치 약에 주머니 털리기 십상이다.

1999년 첫 특별검사 도입 때가 비슷했다. 이른바 옷로비 의혹사건이다. 재벌 부인이 검찰총장 부인의 명품 옷값을 대신 냈다는 거다. 권력과 금력의 검은 짬짜미라는 점에서 국민정서를 건드렸다.

당시 김대중정권은 수렁에 빠진 상황이 됐다. ‘기승전옷’이었다. 검찰 수사에 이어 국회청문회가 열렸다. 실패한 로비이냐 포기한 로비이냐 공방 끝에 특별검사법이 통과됐다. 특검의 칼끝은 태생적으로 권력을 향한다. 야당과 보수 언론의 집요한 공격이 뉴스를 도배했다. 결론은 허무했다. 대검은 ‘실체 없는 로비’로 결론지었다. 7개월 동안 온 나라를 뒤흔들었지만 “앙드레 김 본명이 김봉남이란 사실만 밝혔다”는 비판이 일었다.

문제는 옷로비 특검 공세에 김대중정부의 성과는 묻혀버렸다는 점이다. 금 모으기로 대표되는 IMF 경제위기 극복, 북방외교로 햇볕정책 바탕 다지기, IT시대를 이끌 청사진 등은 가려졌다. 야당은 성공했다. 이듬해 2000년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33석을 얻어 원내 제1당을 유지한다.

야당 특검공세에 가려진 정권의 무능

세월이 흘러 작금의 특별검사 논란은 어떨까. 야당이 정권을 겨냥하고 국민정서를 자극하는 것은 공통적이다. 헌데 다른 점이 있다. 현란한 특검 공세가 정권의 성과를 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권의 무능을 덮어주고 있는 듯하다.

악화일로를 치닫는 경제위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북한이 파병하면서 한반도에 드리워진 안보위기, 의료개혁을 필두로 이른바 ‘4+1 개혁’의 좌초위기, 무엇보다 양극화 속에 절망에 빠진 자영업자의 생존위기, 삼성전자 주가의 하락이 시사하는 청년세대의 미래위기까지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국민의 시선을 돌리고 눈을 가리는 결과를 빚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불공정과 몰상식의 정상화도 중요하다. 그렇다고 특검만이 만사해결 처방전은 아니지 않나. 전방위 위기에 처한 지금이 유능한 야당의 실력을 보여줘야 할 때가 아닌가. 경제와 민생, 안보에 입법권력으로서 이니셔티브를 쥐고 말이다. 자칫하면 쳇바퀴 대치에 여야가 공멸할 수도 있다.

미국 증시는 트럼프 특수를 기대하며 사상 최고로 달아오른다. 반대로 한국 증시는 얼어붙고 환율도 달러 당 1400원을 뚫었다. 부동산도 서울에만 매물이 9만채에 이른다. 각종 지표도, 체감경기도 싸늘하다.

그럼에도 정국의 열쇠는 정부여당이 쥐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호의 방향타를 잡고 있는 대통령이 중요하다. 벌써 한반도에는 태풍전야의 긴장감이 감돈다. 미중 갈등과 북미간 행보도 예측하기 어렵다.

돌아온 트럼프가 태풍의 눈이다. 동북아의 정세는 비등점 바로 아래다. 압력을 조금이라도 높이거나 기름을 끼얹으면 곧바로 끓어오를 태세다. 좀 진부하더라도 청나라 말기 리쭝우의 ‘후흑(厚黑)론’을 다시 끌어와 보자. 본디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곤욕을 치르던 청나라에 제시한 일종의 역설 정치학이니까.

난세에는 면후심흑(面厚心黑), 낯이 두껍고 속이 시커먼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거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대표적인 면후심흑으로 보인다. 온갖 추문과 법 위반에도 징검다리 재선에 성공했으니까.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도 면후심흑일 것이다. 하방(下放)에 이어 수많은 역경에도 끝내 주석에 오르고, 유례없는 세 번째 연임이다. 시황제(習皇帝)로 불리는 연유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면후심흑이 분명하다. 2000년부터 시작해 현재 8대 대통령으로 5연임 중이다. 중간에 권좌를 측근 메드베데프에게 잠시 맡겼다가 회수했다. 별명이 ‘차르’이다. 일본의 시게루 총리는 면박심흑(面薄心黑)으로 비친다. 28세에 중의원 당선돼 무소속을 오가며 11선을 했다. 이번에 비록 야스쿠니 신사에 공물을 봉납했지만 참배는 하지 않았다. 기독교인의 신념이겠다. 자신의 의지를 선명히 하면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난 정치역정이다.

윤 대통령 가슴속엔 경세제민이 있을까

여하튼 주변 국가의 수장은 모두가 심흑(心黑)이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은 어떨까. 아마도 면박심백(面薄心白)이 아닐까. 유복한 집안에서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 특질이다. 중국 역사에서 초패왕 항우가 대표적이다. 노여움이 얼굴에 드러나고 자주 격노한다고 하지 않나. 속도 빤해 미생지신(尾生之信)의 개정판인 듯하다. 과연 경세제민(經世濟民)이 흉중에 자리하고 있을지.

목하 불신과 자국 이익의 전방위 외교전쟁 중이다. 후흑론에서 궁극의 경지는 낯이 두꺼우면서도 형체가 없고 속이 검으면서도 색깔이 없는 상태라고 한다. 무형무색이다. 그런데 낯이 극단적으로 얇으면서 속도 빤히 보이면 이 역시 무형무색과 통할까. 그렇게라도 이 위기를 극복하면 좋겠다.

박종권 언론인 전 중앙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