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면기 칼럼

‘철부지’의 내란 키운 정치검찰과 파시즘의 좀비들

2025-01-09 13:00:02 게재

12.3 이후 한달, 내란의 밤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대통령의 신병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지만 그는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한 채 극우세력에게 사실상의 내전을 독려하고 있다. 경찰과 공수처가 다시 체포에 나선다고 하지만 국민들은 내란범을 내놓으라는 세력과 지키려는 세력의 물리적 충돌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국민의힘이 내란 피의자, 그리고 그 비호세력과 한통속이 되어 사사건건 시시비비를 가리자며 헌정질서 회복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공당이 내란을 옹위하는 해괴한 일이 아무렇지 않은 듯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은 더 늦기 전에 내란세력과 결별하고 ‘내란옹호당’이라는 오명을 털어내야 한다. 대통령도 정당한 법집행 절차에 당당히 응하는 것이 도리다. 그것이 더 이상의 혼란과 분열을 막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의 밤은 섬뜩했다. 중무장한 군이 국회와 선거관리위원회에 들이닥치고 계엄사령관은 전시에도 정당화되기 어려운 살벌한 포고령을 발포했다. 권력자의 눈밖에 난 정치인은 체포 감금의 대상이 되었고 언론과 시민의 입에는 재갈이 물려졌다. 분노한 시민, 기민한 국회, 출동한 ‘군인시민’의 자제력으로 이 광란을 멈춰세운 것은 그야말로 천행이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권력의 고삐를 잡아챈 위대한 ‘시민혁명’이었다.

그럼에도 이번 내란의 상처는 너무나 깊고 아프다. 국격은 추락하고 경제는 위태로워졌으며 안보는 불안해졌고 국민들은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여야는 조속히 상황을 진정시키고 윤석열 이후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와 법원의 판단 후 대선에 모든 관심이 쏠리겠지만 ‘윤석열 충격’을 치유할 학문적 논의 역시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민혁명이 소생시킨 민주주의를 견고히 지켜나갈 전략과 방법론들을 시급히 마련해갈 때다.

누가 ‘5살 꼬마’에게 총을 쥐어주었나

“자만에 빠진 자들은 지배의식과 승리감에 빠져 있다. 이런 자기만족은 외부의 견해를 일체 거부하게 하고 귀를 닫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게 한다. 이들은 신중함이나 심사숙고, 절차같은 것을 무시하고 매사에 개입한다. ‘응석받이’나 ‘철부지’같은 인간이다.”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set)가 1930년 역저 ‘대중의 반역’에서 한 말이다. 능력도 없으면서 사회를 지배하겠다는 대중의 욕망이 파시즘을 불러올 것이라는 경고였다.

오늘 한국 대통령의 행태를 그림처럼 묘사한 이 말은 21세기 한국이 대중 아닌 권력자나 권력엘리트에 의한 파시즘으로 빠져들 수 있음을 시사하는 불행한 예언이 되었다.

돌아보면 지난 2년 7개월 집권세력의 통치가 그랬다. 정치적 이견은 허용되지 않으며 반대세력은 철저히 억압되고 무시되었다. 권력이 언론과 학술을 지배했고, 법은 권력의 전유물이 되었고, 권력의 부패는 은폐되었으며, 권력에 대한 항의는 종북좌파 반국가세력으로 제거 대상이 됐다.

“나에게 한 문장만 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던 괴벨스의 교의는 “누구든 탈탈 털어 기소를 해버리면 그를 만신창이로 만들 수 있다”는 살기어린 사법적 전횡으로 실천되었다. 물론 이런 정치적 타락의 뒤에는 언제나 ‘법과 원칙’을 되뇌던 검찰이 있었다. 대통령 자신이 검찰 출신이기도 하지만 명태균 말대로 총을 가진 ‘5살 꼬마’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도 검찰이었다.

주술의 속삭임에 기대 ‘왕’이 되고자 했던 권력자는 급기야 비상계엄이란 자멸의 카드를 빼들었다. 역대 보수정권의 비호 속에 세포를 증식해온 극우 정치세력을 믿고 벌인 광란이었다. 이 기괴한 조합은 파시즘 좀비를 깨워내고 뉴라이트의 친미 친일의 사대주의를 불러냈다. 그리고 극우 유튜버와 극우언론과 공모해 근거없는 분노, 음모론을 조직적으로 도발하면서 민주주의를 흔들고 있다. 공산주의로 권력을 정당화했던 히틀러의 선동술이나 부정선거 음모론으로 재미를 보았던 트럼프를 뒤따라가는 전광훈같은 이도 활개를 쳤다.

민주주의가 없으면 평화도 없다. 정당은 그들을 계도하는 주체이지 그들에 기생해 표를 구걸하는 존재가 아니다. 검찰은 ‘자유’와 ‘보수’로 위장한 자들을 제거하는 민주주의 방어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지금은 칠흑같은 밤, 여명 준비할 때

일찍이 작가 이병주는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법률가를 야망과 허상에 목을 맨 ‘벌레’같은 존재라고 통타한 적이 있다. 철학없는 법학교육의 위험성을 일깨운 외침이 지금 다시 새롭다. ‘영혼없는 지식인’을 길러냈다는 참담함을 담았던 지난해 11월 서울대 교수의 시국선언도 같은 맥락이다.

지금은 칠흑같은 밤, 여명을 준비할 때다. 한때는 누구보다 촉망받았을 검찰과 권력엘리트, 그리고 젊음을 설레게 했던 장군들이 이제는 낮은 사람들의 손을 잡고 시대의 어둠을 뚫고 나가는 헌신과 희생의 리더십을 발휘할 때다. 추락한 명예를 회복하고 나라를 다시 바로 세우는 길이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