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4일제 도입논란
"주4일제, 생산과정·생활방식·사회관계 달라질 것"
2020년 한국 노동시간 OECD 4번째로 길어 … 핵심대상은 중소기업과 저·중간임금 노동자
주4일 근무제가 20대 대통령 선거 의제로 떠올랐다. 심상정 정의당 대선후보가 1호 공약으로 주4일제 로드맵을 제시하면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도 공감대를 형성했다. 세계적으로 주4일제 노동시간 단축 문제가 공론화되고 있다.
주4일제 논의가 시작된 배경은 우리나라의 긴 노동시간이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장시간 일을 하는 국가로 하위 4위다. 지난해 한국의 연간노동시간은 1908시간이다. OECD 회원국 평균 1687시간보다 200시간, 1년에 1개월 더 일을 한다.
OECD 국가 대부분은 연차휴가를 24~30일 보장하고 소진율도 23~30일이다. 한국의 연차휴가는 15일로 절반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소진율은 8일에 그친다.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 지표는 2019년 OECD 기준 10점 만점에 4.1점에 불과하다. 독일 핀란드 프랑스 등 평균 8.4의 절반 이하고 일중독 사회라는 미국보다 낮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지속되면서 재택근무가 확산되고 워라밸을 중요시하는 젊은세대 분위기 속에서 노동시간 단축(주32시간, 주35시간)이나 근무형태 변화(주4일, 주4.5일: 금요일 오전 근무, 또는 월요일 오후 출근) 논의가 활발히 진행중이다.
보건의료 분야 등 필수노동자의 노동안전 보장 차원과 맞물려 △적정한 노동 △일과 휴식의 조화 △인력충원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제기되는 상황이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6일 '주4일제와 다양한 노동시간 단축 모델 : 시간의 정치를 향한 실험들'이란 보고서를 발표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지난 200년 산업화 시기 파괴적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이제는 '시간의 정치'를 고민할 시점"이라며 "산업재해 감소와 노동자들의 건강한 삶을 위해 노동시간의 변화가 필요한 시기"라고 주장했다.
김 위원은 "탄소배출량 감소와 맞물린 정의로운 전환의 핵심은 노동시간 단축이며, 평생학습사회 준비와 생애주기 노동시간을 모색할 시점"이라며 "주4일제 노동시간 단축은 지역 커뮤니티와 공동체 활성화의 촉매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이슬란드 주4일제 실험이 논의 촉발 = 우리나라는 1989년 주48시간제(1일 8시간, 주6일 근무)에서 주44시간제(주 6일, 토요일 4시간 근무)로 법정노동시간을 단축했다. 2004년 7월부터는 단계적으로 주40시간이 시행됐다. 2018년부터 주52시간 상한제가 시행되고 있으나 일부 업종은 제외됐고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아이슬란드의 주4일제 실험은 본격적인 논의를 촉발시켰다. 아이슬란드는 지방정부 레이캬비크시(2014~2019년), 중앙정부(2015~2021년)에서 전체 경제활동인구 1.3%에 달하는 유치원 교사, 회사원, 병원 종사자 등 다양한 직군이 포함된 2500여명을 대상으로 주4일제 실험을 진행했다.
노동시간이 줄자 스트레스로 인한 번아웃(소진) 등 신체적·정신적 고통이 거의 사라졌고 일과 삶의 균형이 개선됐다. 이후 전체 노동인구의 86%가 기존과 같은 임금을 받으면서 더 적은 시간을 근무할 수 있게 됐다. 실험이 진행된 기간 노동생산성 연성장률은 1.7%에서 3.8%로 증가했다.
영국 BBC방송은 "아이슬란드의 실험은 엄청난(overwhelming) 성공을 거뒀다"고 평가했다.
최근 스페인(2021년)과 스코틀랜드(2021년 하반기)도 주4일제를 실험했다. 2019년 기준 미국 기업의 27%가 주4일제를 도입했다.
지난 7월 민주당 소속 마크 타카노 하원의원 등이 공동발의한 '주 32시간 근무제도' 도입 법안이 이달 초 하원 내 진보 진영의 지지를 확보했다. 타카노 법안은 표준근로시간을 현행 주 40시간에서 32시간으로 단축하고 32시간을 초과한 근무에 대해서는 수당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영국 인터넷 전문은행인 아톰은행은 11월부터 내년까지 직원 430명을 대상으로 주4일 근무제를 실험하고 있다. 주당 근무시간을 37.5시간에서 34시간으로 단축하고 월요일이나 금요일 중 하루를 골라 쉴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4일제, 주4.5일제 등으로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종합교육기업 에듀윌은 2019년 6월부터 임금삭감 없이 주4일 근무제를 도입했다. 월요일과 금요일에 쉬는 직원이 가장 많다.
게임회사 카카오게임즈와 엔돌핀커넥트, 패션브랜드 뮬라웨어, 독서 플랫폼 ‘밀리의 서재’, SK수펙스추구협의회 등이 주4일제를 실시한다. 배달의민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과 복합 핀테크 플랫폼 토스 운영 ‘비바리퍼블리카’, 배달대행업체 ‘바로고’, 여기어때 운영사 ‘여기어때 컴퍼니’도 주4.5일제(금요일 오전근무 또는 월요일 오후출근)를 하고 있다.
전자상거래 플랫폼 ‘카페24’는 격주 휴무하는 방식으로, SK텔레콤은 매월 셋째주에 주4일 근무를 한다.
여론도 찬성이 다소 높다. 지난달 11월 한국리서치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 주4일제에 대해 찬성이 51%, 반대 41%로 나타나 찬성여론이 10%p 높았다. 50대 이상의 연령에 비교해 20~30대의 찬성 의견(70%)이 높았다.
정규직·비정규직(각 67%, 51%)은 찬성했지만 자영업자는 반대가 61%로 더 높았다. 응답자들은 추가 휴일이 생기면 △건강관리(37%) △취미생활(36%) △여행(32%) △자기계발(27%)을 하겠다고 답했다. 하지만 '임금감소'를 전제하면 찬성 29%, 반대 64%로 나타나 '임금보전'이 중요한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경영계에선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2002년 경제 5단체(대한상의·무역협회·한국경총·중소기업중앙회·전경련)는 신문에 "삶의 질 높이려다 삶의 터전 잃습니다"는 광고를 게재하면서 주5일제 도입에 반대한 바 있다.
◆주5일제 도입후 생산성 하락 없어 = 김 선임연구위원은 "노동시간 단축은 노동자들에게 여러 가지 기회와 삶의 질 향상을 가져왔다"며 "실제 주5일제 도입 이후에도 생산성 하락이나 경제충격은 없었다"고 비판했다.
2017년 한국개발연구원(KDI) 2004~2011년의 데이터 분석 결과 한국에서 주5일제 실시 이후 10인 이상 제조업체의 노동생산성인 1인당 실질 부가가치는 1.5% 늘었다. KDI는 "비효율적으로 오래 일하는 것보다는 효율적으로 짧게 일하는 것이 더 많은 성과를 낸다"며 그에 맞게 임금체계를 개편할 것을 제안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한국의 노동시간 단축과 정책 방향으로 △장시간 및 실노동시간 단축(법정노동시간과 실노동시간 단축 : 장시간 기준 48시간 상한, 특례업종 폐지) △쉴 권리(적정 휴가·휴식시간 부여) △야간노동 규제 △시간주권 확보 △예측가능하고 다양한 교대제를 제시했다.
노동시간 개편 전략은 법정노동시간 현행 40시간에서 32∼35시간으로 단축형태로 추진할 수 있다. 이와 별도로 일하는 형태의 하나인 주4일제 논의와 실험이 제기되고 있다. 주4일제 시행은 주당노동시간 단축과 별개로 1주일 출근일 조정과 시간 단축을 혼재할 수도 있고 법정노동시간 단축과 맞물려 진행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주 4일제 실험을 통한 노동시간 단축 방향과 목표로 '노동자와 일터의 구성원 모두에게 어떤 도움이 되는가' '이와 같은 일하는 방식의 변화는 지속가능한가'를 제시했다.
노동자 관점에서는 △장시간 노동 등 열악한 노동현실 개선(이직률 감소와 장기근속 등) △노동자 건강과 안전(산재 과로 병가 등) △일과 삶의 조화 통한 자기 모색(자기활동, 학습교육, 역량 형성) △노동시간 단축 과정에서 필요 신규 일자리 충원(15% 내외) △기후위기와 탄소유발 대응 노동체계 변화 등을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김 연구위원은 "통상적으로 우리가 일터에서 노동시간으로 간주되는 시간의 상당부분은 휴일휴가, 출산·육아·돌봄휴가, 학습기회와 소득 지원 등 '복지시간'이라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면서 "노동시간 단축 방향은 효과성, 실현가능성, 보편성이라 3가지 원칙을 중심으로 검토되고 실험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주4일제 방식, 산업·사업장 특성에 맞게 = 주4일제 방식도 산업 및 사업장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가 필요하다. 병원이나 운송 같이 1년 365일 운영되는 곳은 7일 중 4일 방식이 가능하다. 또한 단기적으로는 주4일제는 격주 혹은 주4.5일제 형태도 고려할 수 있다.
실험 도입 과정에서 인센티브 전략도 병행해 가칭 '노동시간 단축 사업장 고용지원제도' 검토 등이 검토될 수 있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중소영세 사업장과 노동자들 인력과 소득 지원 등을 위해서는 기존 정부의 목적 사업(노동시간, 일자리)을 전용해 사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 방법"이라면서 "이 과정에서 프랑스처럼 국회와 정부에 가칭 '노동시간 위원회'를 설치·운영해 괜찮은 노동시간 전환을 위한 지속가능한 노동의 제도적 구속력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회·정부에 가칭 '노동시간 위원회' 설치 = 주4일제는 기존의 주 44시간에서 주 40시간으로 이행하던 '노동시간 단축'과는 다른 경로와 방법으로 진행돼야 한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대기업, 고소득 일자리는 이미 주4.5일제와 같은 근무형태와 특별휴가 등이 보장돼 있다"면서 "주4일제 핵심 대상은 중위소득에 해당하는 중소기업과 저·중간 임금 수준 노동자들"이라고 말한다.
다양한 이전소득 정책(사회보험료 지원 및 노동시간 단축지원자금 등)을 통해 주4일제 시행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 △최소생활노동시간보장과 소득지원(비정규직 평등수당, 이전소득) 병행 △'자기활동·자기개발계좌제' 정책을 통한 좋은 일자리 정책 설계 등을 제시했다.
경영계는 시기상조라는 입장이다. 한국경영자 총협회는 "주52시간제가 정착되지 않은 상황에서 추가로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주4일제 논의는 시기상조"라며 "이러한 상황에서 주4일제를 강행한다면 할 수 있는 기업과 할 수 없는 기업간 양극화도 심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지금은 주52시간 단축제도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유연근무제 보완 등에 정책의 중심을 맞춰야 할 때"라며 "우리나라는 노동경직성이 높은 반면 노동생산성은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주요 선진국의 60~70%% 수준인 현실에서 주4일제 시행은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주4일제 실험은 단순 노동시간 단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의 과정과 생활방식, 사회적 관계까지 어떤 변화가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라며 "중소 영세 사업장이나 저임금 노동자들에게는 1년 6개월에서 2년간 실험을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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