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개혁,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① 전문가 50명 조사

52% "정경유착 근절하려면 재벌개혁이 우선"

2017-01-17 10:53:31 게재

정치권 각성·사회 의식변화 요구도 높아 …'총수 제왕적 경영' 비판

내일신문이 경제·경영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조사결과 재벌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이 높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경유착을 끊기 위한 우선 과제로 '재벌개혁'을 꼽아 사회 각층과 정치권에서 나오는 경제민주화 주장과 궤를 같이한다.

지난해 12월 6일 국회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회의에 증인으로 출석한 재벌 총수들이 의원 질의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정경유착의 전형' = 경제전문가들은 재벌이 관여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정경유착'의 하나로 파악했다.

경제단체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정경유착의 전형"이라며 "대기업 중심 경제구조의 폐해를 보여준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정치권력(청와대)의 압력에 어쩔 수 없었다는 반론에 대해 서울에 있는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재벌들은 정권의 압력에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공짜는 없는 것"이라며 "결국 재벌들도 정경유착을 통해 필요한 것을 얻어낸 것이며 일정 정도 공범이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설문조사에서 "정경유착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사이의 상호작용 결과물"이라고 규정했다. 김 교수는 이어서 "지금 재벌은 막강한 경제력을 갖고 있지만 지배구조와 승계구도에서 매우 취약한 상황에 있으므로 재벌이 정치권력의 비호를 요구하는 측면이 매우 강하다"며 "정치권력과 재벌은 공생관계에 있고 공범"이라고 잘라 말했다.


◆재벌부터 바꿔 정경유착 끊어야 = 전문가들은 '정경유착을 끊기 위해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과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전체 52%(복수응답)가 '재벌개혁'을 선택했다.

'정치권의 각성'을 선택한 응답자는 42%로 이에 못미쳤다. 재벌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이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보다 많은 셈이다.

'법적 처벌 강화와 규제 확대'를 선택한 응답자는 두 번째로 많은 44%였다. 재벌총수 일가에 대한 단호한 법집행을 요구하며 사전 또는 사후 규제를 강화해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소액주주 권한 강화'와 '외부감사와 언론 시민단체 감시 강화' 항목을 선택한 응답자는 각각 12%, 10%로 다른 항목에 비해 낮았다.

'사회 전반적인 의식변화'를 선택한 전문가는 30%에 달했다. 재벌개혁이 한 두 사람이나 일부의 의지만 가지고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보는 전문가들이 상당수임을 알 수 있다. 재벌개혁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어려운 과제임을 보여준 답변으로 풀이된다.

박상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정부주도와 재벌중심의 개발도상국 발전전략으로 경제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점에 의견이 모아졌다"며 "약자의 재산권 보호와 재벌의 경제력 집중 해소, 정부 역할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이번 사건은 개혁에 대해 보다 절박한 필요성을 공유하는 계기가 됐다"며 "올해 대선을 계기로 재벌개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재벌개혁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총수일가의 제왕적 경영' 재벌개혁의 핵심 대상 = 이처럼 정경유착을 끊기 위해서는 우선 재벌개혁부터 해야 한다는 전문가의 의견이 많았다. 이어서 '재벌개혁의 핵심 대상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전문가들에게 던졌다.

응답자의 42%는 '총수일가의 제왕적 경영'을 꼽았다. 우리나라 총수일가는 자신이 하고 싶은 사업이나 인사에 대해 이사회나 임원의 제지 없이 마음대로 전횡했다는 현실을 반영한 응답이다.

재벌 총수들은 법인의 이익이나 주주의 이해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사익을 먼저 챙겨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신사업 진출을 결정할 때도 시장 상황이나 내부 역량보다는 총수의 개인적 호불호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았다. 총수 취미로 시작한 명견 기르기를 나중에 계열사가 떠안은 사례도 있다.

26%의 전문가들은 재벌개혁 핵심 대상으로 '총수일가의 사익편취'(일감몰아주기 등)를 선택했다. 회사가 맡아서 해야 할 사업 기회를 총수일가 지분이 높은 별도 회사에 주거나 계열사 일감을 이 회사에 몰아주는 일 따위를 재벌개혁 대상으로 꼽은 것이다.

'불법·편법적인 경영권 승계'와 '거수기 역할을 하는 이사회'를 선택한 전문가는 각각 10%, 12%였다. '중소기업 영역 침범과 납품단가 인하'를 재벌개혁 대상으로 본 응답자는 8%에 불과했다. 다른 항목에 비해 비교적 낮은 응답률을 보였다.

◆26% "정치권력 요구에 따른 것" = 전문가들의 26%는 재벌그룹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기금을 출연한 것은 '정치권력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서'라고 답했다.

'재벌도 공범이다'는 구호에 동의하지 않는 전문가들은 이유에 대해 '권력의 힘에 대기업도 꼼짝 못하는 갑을 관계에 있다'거나 '막강한 대통령제에서 정치가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답했다.

민간경제연구소 임원은 "예전부터 국가운영과 관련해 관례적으로 해왔던 일이거나 강요에 의한 기부이기 때문"이라고 응답했다. 또 다른 민간연구소 연구원은 "일부 기업의 사안을 전체로 확대해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며 사안별로 봐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는 "재벌과 재벌총수를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며 "책임문제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신 교수는 '낙수효과'에 대해 "해외에 공장을 짓는 재벌들에 금융상 세제상 혜택을 주는 셈이어서 국내에 낙수효과가 없다"며 "정부의 과도한 재벌중심 지원 정책에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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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현주 기자 hjbeo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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