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와 성취평가
대입제도 안 바뀌면 성취평가 어렵다
성취평가 담당 교사 대상 설문조사 … "현 대입제도가 선택형 교육과정 걸림돌"
교육부가 최근 고교학점제 종합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공통과목을 제외한 선택과목은 모두 5단계 성취평가제(A~E)로 전환한다고 밝혔다. 고교학점제에 앞서 학생들이 진로와 관심 분야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이미 적용됐지만, 평가 체계는 여전히 상대평가(1~9등급) 중심이다. 과목 이수자 수가 적을수록 석차등급에서 불리하다.
상대평가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고교학점제가 도입되려면 이 같은 부담을 덜어줄 '선택과목 성취평가제 완전 전환'은 필수적이다. 고3 학생들은 진로선택과목의 경우 석차등급 없이 3단계 성취도 평가(A~C)가 첫 적용된 세대다. 이 학생들이 지난해 이수한 진로선택과목은 사실상 첫 성취평가제 시도라 할 수 있다. 이 수업과 평가를 담당한 교사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통해 성취평가제 현장 안착을 위한 과제를 짚어봤다.
교육부는 고교학점제 도입에 맞춰 석차등급 중심의 현행 교과평가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래형 수능과 대입 방향을 수립하기 위한 논의에 착수하겠다"고 발표했다. 고교 평가제도 혁신은 대입 제도 변화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현장에서 진로선택과목의 수업과 평가를 담당한 교사들은 "학생들 과목 선택이 자유로워지는 등 성취평가제의 긍정적 효과를 체감했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정부는 '공정성'을 이유로 학생부종합전형을 축소하고, 학생부교과전형과 수능 중심의 정시를 확대했다. 교사들은 "이는 학생 선택 중심 교육과정에 걸림돌로 작용하는 대입 제도"라며 "성취평가제 확대와 성적으로 줄을 세우는 정량평가식 대입전형은 양립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성적 중심 대입전형 확대는 모순 = 성취평가제는 상대적 서열에 따라 '누가 더 잘했는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이 무엇을 어느 정도 성취했는지'를 평가한다. 평가의 본래 의미이자 교육적으로 더 적절한 평가 방식이라는 데 이견은 없다.
성취평가제 도입은 교육계의 오랜 숙제였지만 대입 제도에 가로막혀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9등급 상대평가보다 줄세우기 기능이 약화돼 학생 선발에 어려움을 줄 수 있고, 자칫 고교 현장에 '내신 부풀리기'가 나타날 수 있다는 주장 때문이다.
교육부는 성취평가제를 진로선택과목에 우선 도입하고, 대입 정보로 '성취수준별 학생비율'을 추가로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같은 과목 안에서 'A-B-C' 3단계 성취도별 학생비율을 별도로 기재하는 것이다. 석차등급 대신 이를 추가로 제공해 '평가 변별력'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대입 제도에 대한 현 정부의 방침은 수능 중심의 정시, 교과성적 중심의 학생부교과전형 확대다. 성적 외에도 학생들의 고교생활 전반을 평가하는 학생부종합전형은 축소 쪽으로 입장을 정했다. 2019년 11월 교육부는 '대입 공정성 강화 방안'을 발표하며 서울 소재 대학에 "학생과 학부모가 불공정한 전형으로 인식하는 학생부종합전형을 줄이고, 수능 위주 전형과 함께 교과성적 위주의 지역 균형 선발 전형으로 10% 이상 선발할 것"을 권고했다.
교육계에서는 학생 선택 중심 교육과정과 성적으로 줄세우는 대입 제도는 배치된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2022학년도 대입부터 서울 소재 16개 대학의 경우 정시전형 확대와 함께 7.8%였던 학생부교과전형의 비중도 11.3%로 늘렸다.
실제 일부 대학은 성취평가로 전환된 진로선택과목의 성취도별 학생 비율까지 고려해 교과성적 산출식을 만들었다. 학생이 이수한 진로선택과목 안에서 성취도 A를 받은 학생의 비율이 지나치게 높으면 상대적으로 성취도 B를 받은 학생의 점수가 하락하거나, 성취도 A를 받은 학생의 점수가 낮아지는 구조다.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몰리는 대학은 교과성적으로만 변별해야 하니 반영 방식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교과 반영 방식 등 대입 유불리 부담 = 지난해 고교 현장에서 진로선택과목 성취평가제를 첫 시도했던 교사들은 학생부교과전형 확대에 따른 대입 유불리 문제에서 자유롭기 어려웠던 것으로 나타났다.
진로선택과목 수업과 평가를 담당했던 교사 80여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이번 설문에서 응답자들은 평가 설계시 가장 우선시한 기준이 '교육과정상 성취기준과 성취수준(43.8%)'이었다고 답했다. 반면 '적절한 난도 조절(39.8%)'이 가장 고민스러웠다고 답했다. '교과 반영 방식 등 대입 유불리(30.1%)'나 '성적 부풀리기 우려(22.3%)'도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설문 결과에 대해 김덕년 경기 인창고 교장은 "성취평가제 본질은 변별이 아닌, 교육과정상 성취기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학생들의 성취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라며 "교사들이 그에 따라 수업과 평가를 디자인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김 교장은 "학생들이 보인 성취수준에 따라 그대로 성취도를 주기에는 대입에 대한 부담을 떨칠 수 없었을 것"이라며 "지필평가의 난도를 조절해 대입에 불리하지 않게 성취도별 비율을 인위적으로 조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고민이 뒤섞인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결국 9단계의 변별이 3단계로 줄어들었을 뿐, 기존의 상대평가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성취평가제 이후 가장 큰 변화는 학생들의 과목 선택이 좀 더 자유로워졌다는 점이다. '성취평가제가 적용되는 과목 수업의 장점은 무엇이었는지' 묻는 질문에 42.6%의 교사들이 '석차등급 부담을 덜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선택 유도'라고 답했다.
'문제풀이나 수능 위주 수업에서 탈피한 역량 중심 수업이 가능해졌다'(30.6%), '다양한 수행평가 및 서술·논술형 평가 시도'(10.2%), '학생들의 높은 수업 참여 동기부여'(8.3%)도 성취평가제가 가져온 유의미한 경험이었다.
◆성취평가, 과목선택에 긍정적 효과 = 한 교사는 "성취평가로 진행하니 학생들 사이의 협업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며 "교사들도 자유로운 수업과 평가를 할 수 있었다"고 답했다. 서열 중심의 평가틀을 벗어나는 순간, 확연하게 나타난 변화다.
현행 대입 제도는 여전한 장벽이다. '고교 성취평가제의 교육적 취지를 살리면서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현재 가장 필요한 것'을 묻는 질문에 55.3%의 교사들이 '교과 성취평가제 확대에 걸맞은 대입 제도 도입'이라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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