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들 겨울나기

조류독감 이겨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두루미들

2023-02-20 11:47:51 게재

연천·철원·파주에는 조류독감 걸린 두루미류 없어 … 순천만 여자만도 지난해 12월 이후 더이상 발생 안해

빙하기가 끝난 후 한반도의 가을은 '뚜룩뚜룩!' 울리는 두루미 울음소리로 시작됐다. 예전부터 '학(鶴)'이라고 불렀던 두루미는 아득한 시신세(6000만~4000만년 전)에 태어났다. 그때 같이 태어난 동물들은 지구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다.
미국의 생태학자 알도 레오폴드(1887~1948)는 두루미 울음소리를 "진화의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두루미의 귀환은 지질학적 시계가 똑딱거리는 소리"라고도 했다.
자유로를 달리다 보면 '철새도래지 경적 금지'라는 경고판이 보인다. 이곳은 한강과 공릉천, 임진강이 만나는 거대한 습지다. 이 일대는 우리나라 최대의 두루미 재두루미 월동지였다. 재두루미 떼가 내려앉으면 들판이 회색으로 바뀔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자유로는 그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동시에 민통선도 다 해제됐다. 밀려난 두루미들은 강 건너 김포 홍도평야로 갔다. 홍도평야도 김포신도시와 우회도로, 일산대교 연결도로 건설로 산산조각이 났다.
'생태계 보전'이라는 헛된 구호로 지금과 같은 개발사업을 계속한다면 두루미들은 이별의 트럼펫을 불며 한반도를 떠날 것이다.

14일 오후 비행연습을 위해 날아오르는 두루미 가족. 가운데가 아빠, 왼쪽이 엄마, 오른쪽이 새끼 두루미다. 임진강 옆 경사진 비탈에서 발생하는 상승기류를 이용해 날아오르고 있다.


14일 오후 경기도 연천 임진강 망제여울. 고개를 내려가는데 300여마리가 넘는 두루미·재두루미가 여울에 모여있는 모습이 보인다.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김경도 한국내셔널트러스트 DMZ위원장이 "여기서 차를 세우면 두루미들이 날아간다"며 "우리 율무밭까지 가자"고 했다.

김 위원장은 "철원 두루미들은 사람이 가까이 가도 본체만체 먹이만 먹는데, 연천 두루미들은 민감하다"며 "모니터링을 할 때도 차를 세우지 않고 천천히 이동하면서 두루미 개체수를 센다"고 말했다.

망제여울 200m 상류에는 내셔널트러스트가 시민모금으로 땅을 사서 두루미 먹이터로 제공하는 율무밭이 있다. 율무밭 옆 횡산리 주민들이 운영하는 '두루미 관찰용 비닐하우스'에서 두루미들을 보았다.

어느 정도 고도를 올린 뒤에는 본격적으로 상승기류를 이용해 원을 그리며 점점 높이 날아오른다. 이런 비행을 '활상'(滑翔 soaring)이라고 한다. 맨 뒤에 따라가는 새끼 두루미는 얼굴과 목 주변이 노란색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월동지" = 2019년 1월 연천 임진강을 방문한 국제두루미재단 설립자 아치볼드 박사가 "세계적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두루미 월동지는 없다"고 한 바로 그곳이다.

망제여울은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필승교와 장군여울 사이에 있다. 군남댐 담수 영향을 받는 장군여울과 달리 망제여울에는 강물이 흐른다. 그래서 기온이 영하 20도 이하로 떨어져도 얼지 않는다.

이런 천혜의 여울이 있으니 연천에 오는 두루미들은 사람들이 만들어준 무논(물을 채운 논)을 이용하지 않는다. 고인 물을 이용하지 않고 깨끗한 임진강물을 먹으니 연천 두루미들은 올해 조류독감에도 걸리지 않았다.

두루미 100여마리, 재두루미 200여마리가 사이좋게 어울려 여울 속에 부리를 담그고 '다슬기'로 보이는 먹이를 잡아먹고 있다. 장거리 이동을 위해 고단백성 먹이를 섭취하는 것이다.

임진강 망제여울 상공을 활공하듯 비행하는 두루미 가족. 역광에 빛나는 하얀 깃털이 무척 아름답다. 재두루미는 날개끝이 까맣기 때문에 하늘을 날아갈 때도 두루미와 쉽게 구별이 된다.


새들은 하늘을 날기 위해 최대한 몸을 가볍게 만드는 쪽으로 진화했다. 무거운 턱뼈와 이(치아)를 버리고 가벼운 부리를 선택했다. 대신 강한 소화액으로 삼킨 먹이를 녹인다. 다슬기처럼 딱딱한 먹이는 어떻게 소화할까?

김 위원장은 "두루미는 덩어리진 똥을 누는데, 그 안에 보면 작은 돌들이 섞여있다"며 "위(모래주머니) 안에 돌을 채우고 있으면 무거우니까 먹이와 같이 먹고 배설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참을 보고 있으니 '고라니' 한마리가 헤엄쳐서 임진강을 건너온 뒤 두루미들 사이로 지나간다. 두루미들도 익숙한지 별로 경계하지 않는 모습이다.

김 위원장은 "20년 동안 이렇게 많은 두루미들이 망제여울에 모인 건 처음 본다"며 "연천 율무두루미들은 텃세가 심해 철저히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데, 북상할 때가 가까우니 함께 무리지어 이동하기 위해 경계심을 푼 것 같다"고 말했다.

"엄마! 왜 이렇게 힘들어?" "날개를 쫙 펴봐!"


오후 3시가 넘어 햇살을 받아 따뜻해진 공기가 상승기류를 만들자 두루미들이 비행연습을 시작한다. 대부분 가족 단위, 아빠-엄마-새끼 순이다.

몸무게 12kg에 이르는 두루미는 날개짓만으로는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없다. 상승기류를 타고 원을 그리듯 돌면서 하늘 높이 올라가 글라이더처럼 미끄러지듯 날아간다.

"이렇게?" "그렇지! 다리도 쭉 뻗어보렴!"


새들이 이렇게 나는 것을 '활상'(滑翔 soaring)이라고 한다. '범상'(帆翔)이라고도 하는데 국어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이즈미 월동 두루미 거의 다 북상 = 이기섭 박사(한국물새네트워크)는 19일 "재두루미는 2월 초에 떠난 1500마리를 포함해 17일까지 2300마리가 북상해 이즈미 월동 개체들이 거의 다 올라왔고, 흑두루미들도 17일까지 4500마리 이상이 북쪽으로 떠났다"며 "지난해 봄보다 흑두루미는 10일 가량, 재두루미도 1주일 가량 빠른 북상"이라고 밝혔다.

이즈미에서 올라온 흑두루미들 때문에 순천만은 흑두루미 개체수가 3500~5000마리로 늘었다 줄었다를 반복하고 있다. 흑두루미들은 여자만과 고흥만 등지로 흩어졌다가 먹이 상황에 따라 다시 오기도 하지만 조류독감은 지난해 12월 이후에는 발생하지 않았다.

최근 눈에 띄게 흑두루미 개체수가 늘어난 곳은 서산 천수만이다. 서산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하며 조류보호활동을 하는 김신환 원장은 19일 "천수만의 흑두루미가 4000~5000마리까지 늘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갑자기 개체수가 늘어난 흑두루미들을 위해 19일 오후 벼 800kg을 먹이로 공급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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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 글 사진 남준기 기자 namu@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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