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후소득보장, 우선 공적지원 강화하자│②속빈 강정 퇴직연금

2%대 수익률, 98.4%가 일시수령 … 연금 맞나?

2017-03-22 10:58:42 게재

대·중소기업 양극화 심각 … 가입의무화·활성화 법안 '감감'

퇴직연금제도가 도입된 지 11년이 지나면서 적립금이 130조원으로 8000배나 불어났다. 하지만 물가상승률을 고려한 운영수익률은 사실상 '제로' 수준이고 일시금 수령자는 98.4%에 달해 '연금이 맞나'라는 지적이 나온다. 게다가 중소기업에서의 도입률은 대기업 6분의 1수준에 불과해 양극화가 극심하고 사각지대도 있다. 한마디로 '속 빈 강정'이다.

노후생활안정을 위해 도입된 우리나라 연금체계는 (기초)국민연금과 퇴직임금, 개인연금 등 '다층' 구조로 이뤄져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은퇴 전 소득대체 기능은 취약하고 개인연금은 저소득층에게는 부담스럽다. 그만큼 퇴직연금의 역할은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역할을 못 하고 있다.

적립금 8000배 늘었지만 사업체 가입률은 17.2%에 불과 = 퇴직연금은 2005년 12월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을 시행하면서 도입됐다. 퇴직연금은 근로자가 퇴직할 때 일시적으로 주는 퇴직금 대신 노후에 연금으로 나눠 받아 쓸 수 있도록 한 사적연금제도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퇴직연금제도 도입당시 적립금은 163억원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9월 129조9841억원으로 11년간 8000배 가까이 증가했다. 자본시장연구원은 2030년 적립금 규모가 1000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했다. 외형만 보면 순조롭게 성장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노후소득보장 수단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우선 가입률이 저조하다. 2016년 9월을 기준으로 상용근로자 1157만명(임시·일용직 제외) 가운데 퇴직연금 가입자는 624만명으로 가입률은 53.9%에 그친다. 퇴직연금을 도입한 사업체는 32만43곳으로 전체 사업장의 17.2%에 불과했다. 300인 이상 대기업 도입률은 96.0%에 달했지만 30인 미만 중소기업은 15.5%로 격차가 6배 정도 난다. 기간제, 파견 등 비정규직이 증가하는 노동시장을 고려하면 노후소득의 사각지대와 양극화는 더 커질 것으로 관측된다.

투자수익률이 낮은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2011년부터 2015년까지 최근 5년간 퇴직연금 운영수익률은 연평균 2.5%로 국민연금(4.7%)의 절반 수준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연평균 물가상승률이 1.9%인 것을 고려하면 '0' 수준이다.

퇴직연금은 크게 회사가 운영하는 확정급여형(DB)과 가입자가 직접 운영하는 확정기여형(DC)으로 나뉜다. 퇴직연금의 68.3%(2015년 말 기준)를 차지하는 DB형의 경우 예금과 같은 원금보장상품 투자 비중이 96%나 된다. DC형도 자산의 77%를 원금보장상품에 투자했다. 그렇다 보니 저금리, 저성장시대에 수익률이 저조할 수밖에 없다. 저금리라고 수익률이 다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호주의 퇴직연금은 연평균 9.5%의 수익률을 올리고 있다. 이태호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국민연금 수준의 수익률을 올리려면 원금보장상품이 아닌 주식과 같은 실적배당상품에 투자해야 한다"며 "20, 30년 장기투자로 하면 가능하다"고 말했다.

국민연금보다 못한 소득대체율 = 수익률이 저조하다 보니 퇴직연금의 소득대체율은 국민연금보다 낮다. 소득대체율은 은퇴 뒤 예상되는 생활비 중 연금으로 충당하는 비율을 의미한다.

지난해 국회입법조사처가 박광온 의원(더불어민주당)에게 제출한 '퇴직연금 소득대체율 추정' 보고서에 따르면 퇴직연금 소득대체율은 11.8~20.9%에 머물렀다. 보고서는 지난해 2분기 말 근로자 가구의 월평균 근로소득 411만8371원을 기준으로 가입자가 25년 근속한 뒤 60살에 은퇴하고 83세(남성 평균 사망 연령)까지 연금을 받는다는 가정에 따라 소득대체율을 추정했다. 금리는 2%를 적용했다. 그 결과 DB가입자는 매년 583만원 DC가입자는 757만원을 받아 소득대체율은 각각 11.8%와 20.9%로 계산됐다.

같은 조건일 때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은 25%였다. 근로자들이 명예퇴직 등으로 직장을 그만두면 대부분 퇴직금을 일시에 받는 것도 문제다. 퇴직하면 계좌가 개인형퇴직연금(IRP)으로 옮겨지는데 요건만 갖추면 중도해지가 가능하다. 지난해 9월 기준으로 연금을 받을 요건을 갖춘 55세 이상 퇴직자 가운데 98.4%가 일시금으로 받아갔다. 연금수령은 1.5%에 불과했다. 이름만 퇴직연금이지 여전히 퇴직일시금제도로 운영되는 셈이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이 노후소득 보장 수단으로 기능하기 위해선 제도 도입을 의무화해 가입률을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성인모 금융투자협회 WM서비스 본부장은 "낮은 가입률은 노인 빈곤으로 이어지는 만큼 연금가입을 의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호주 사례를 보면 오랜 기간 사회적 합의를 거쳐 퇴직연금을 의무화해 100%의 가입률을 자랑한다. 인구는 한국의 절반 정도이지만 퇴직연금 적립금은 1700조원으로 우리보다 10배 이상 많다. 자산규모가 크다 보니 수익률이 높고 안정적이다.

퇴직연금 수령방식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 교수는 "일시금을 줄이고 연금수령을 유도할 수 있도록 수급방법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며 "연금제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중간정산이나 해지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수익률 높이고 공적연금화해야 =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적립금 운영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도 많다. 기금형 연금제도는 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대안으로 거론된다. 기존 계약형제도는 가입자가 아닌 금융기관 중심의 지배구조로 저조한 수익률과 선택권 제한 등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반면 기금형제도는 노·사·금융전문가가 기금운용위원회에서 퇴직연금 운영방향과 자산배분 등을 결정하는 방식이다.

황규만 머서코리아 부사장은 "중소기업들이 퇴직연금을 유사한 기업특성에 따라 묶으면 운용자산을 대기업 수준으로 키울 수 있고 규모의 경제효과도 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멕시코와 미국, 호주 등이 도입한 디폴트옵션(자동투자상품)도 검토할 만하다. 디폴트옵션은 특별한 의사표시를 하지 않으면 사전에 정한 포트폴리오에 따라 퇴직연금을 자동운용상품에 투자해 가입자의 연령, 은퇴시점을 고려해 위험자산비중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수익률을 높이면서도 투자자를 보호할 수 있다.

앞서 정부는 2014년 8월 퇴직연금 도입을 단계적으로 의무화하고 중소기업 퇴직연금기금제도를 도입해 가입 사업주에게 재정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은 '사적연금 활성화 대책'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19대 국회에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 처리가 무산되면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20대 국회에서 다시 법안을 제출했으나 제대로 논의가 진행되지 않는 상황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위원장은 "퇴직연금도 장기적으로 공적연금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공적연금화하면 관리비용을 줄이고 소득대체율도 높아지게 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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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기자 nj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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