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1
2024
10월 초에 뉴욕타임스에 실린 칼럼 한편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캐나다 출신 여성 작가인 미레일 시코프가 책 읽기를 죽도록 싫어하는 12세 딸에게 책 한권을 읽을 때 100달러의 ‘뇌물’을 주어 딸의 독서습관을 고쳐 놓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퍼득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습니다. ‘한국의 부모들이 책 안 읽는 아들 딸들에게 이 방법을 쓰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엄마(시코프)가 보기에 딸이 자기 나이 때에 비해 훨씬 똑똑한데 큰 문제가 있는 걸 깨달았습니다. 독서에 관심을 가질 나이인데도 책읽기를 싫어해서 재미있는 소설 같은 책도 몇쪽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고작해야 만화 소설을 보거나 ‘해리포터’를 오디오북으로 듣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엄마는 청소년기에 소설 같은 책을 읽어야 간접체험을 통해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딸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주려 했지만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딸은 ‘책 안 읽는게
10.17
이른바 ‘먹방’은 시청률 보증수표이다. 최불암씨가 입맛을 다시던 ‘한국인의 밥상’은 어느덧 13년째 롱런하고 있다. 지난 10일부터 3인 진행체제로 개편됐지만 만화 ‘식객’의 작자 허영만씨는 6년째 ‘백반기행’ 중이고. 나영석PD의 스타성을 확인해 준 ‘삼시세끼’ 첫 방송이 2014년 10월 17일이다. 딱 10년 됐다. 그동안 산촌 어촌을 거치더니 지난달 미스터트롯 임영웅을 게스트로 ‘삼시세끼 라이트’가 새 시즌을 시작했다. 먹방은 지상파 케이블 홈쇼핑 유튜브 등 매체를 가리지 않는다. ‘먹고 보는 아이들’은 대만 태국의 맛집을 찾아다니고, 홈쇼핑은 구독자 900만명 유튜버와 콜라보로 먹방 생방송을 진행한다. 뭐니뭐니 해도 먹방의 최대 수혜자는 ‘골목식당’의 백종원씨, ‘냉장고를 부탁해’의 최현석 요리사가 아닐까. 그 백종원씨와 최현석씨가 출연한 ‘흑백요리사’가 화제다. 내로라하는 스타 셰프 20명과 도전자 ‘흑수저’ 80명이 요리 솜씨를 겨루는 구성이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10.16
히틀러가 지구촌 곳곳을 서성거린다. 1933년 선거에서 선출된 자신의 권력을 믿고 국회에 “비상사태이니 국회 입법권을 정부에 넘기라”고 요구한 뒤 각종 개혁정책(개악 정책 포함)을 밀어붙인 것과 똑같은 정치적 행보도 보인다. 아르헨티나에서 지난해 8월 대통령직에 깜짝 당선한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얘기다. 오랜 경제난에 시달렸던 아르헨티나 국민은 개혁적인 새 대통령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그는 살인적 인플레이션을 낮춘다는 명분의 파격행보에서 히틀러 같다는 평을 듣는다. 그를 뽑은 이유는 희석되거나 사라졌고 국민의 실망과 반감은 하늘을 찌른다. 밀레이는 지난해 말 총 664조항으로 된 ‘옴니버스 법안’을 만들어 국회에 내밀고 국가비상사태를 이유로 2년간 입법부 권한을 행정부에 이양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히틀러도 그랬다”며 반기를 들고 나선 인물이 1980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아르헨티나의 인권운동가 아돌포 페레스 에스키벨(92)이다. 그는 “히틀러도 독일 국회에 특별권한을
10.15
목요일 아침 공부모임 ‘루첼라이 정원’은 르네상스와 세계 지성사를 배우는 인문학의 열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루첼라이 정원’은 이탈리아 문예부흥을 이끈 피렌체의 루첼라이 가문이 16세기 초 운영했던 학당입니다. 이 이름을 딴 ‘루첼라이 정원’은 참석자들에게 통찰력을 제공하는 공부모임입니다. 어떤 모임은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500여명이 모여 아침식사를 함께하면서 공부를 합니다. 이렇듯 서울의 아침 풍경은 공부 모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듣지 못하는 새로운 이야기에 대한 갈망이 이들을 아침 모임에 나오게 합니다. 아직은 공부와 더불어 네트워크도 강화하는 모임이 많이 남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부 그 자체의 내용이 풍성해야만 참석하겠다는 분위기가 점점 더 커지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아침 모임에 나가서 공부하면서 다른 공부 모임에서 특강 요청이 들어오면 부족하지만 불가피하게 나가 강의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주로 세상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말씀드리곤
10.14
가짜뉴스인 줄 알았다. 지난 목요일(10일) 저녁 8시가 갓 지날 무렵 영시공부모임 단체대화방에 ‘한 강 노벨문학상 수상!’ 아홉 글자가 떴다. 누군가 희망사항을 장난삼아 올렸겠지 여겼다. 곧이어 ‘진짜? 믿기지 않은 쾌거입니다.’ ‘브라보!’ ‘우와!!!’ ‘오!’ 같은 문자가 속속 올라왔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려보고 주요 신문 인터넷판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봐도 ‘긴급 속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가짜뉴스구나! 하고 말았다. 조금 뒤 국제뉴스를 가장 빨리 전하는 연합뉴스 사이트에서 ‘[1보] 노벨문학상에 한국 소설가 한강’이라는 제목만 있는 속보를 발견했다. ‘진짜구나!’ 그제야 문학적 수사가 필요 없는 감격이 밀려왔다. 사실 오랫동안 스스로 노벨문학상 수상을 희망고문해 온 한국인들은 ‘아직은’이라는 체념상태에 빠져 있었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눈물이 고였다.” 시민들은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탄생에 환호작약했다. “살다 보니
10.10
더위로 미루었던 성묘와 벌초를 하러 고향에 다녀왔다. 해가 갈수록 기후변화를 체감한다. 매년 느끼지만 동네 가게들이 하나둘씩 사라진다. 전전해에는 동물병원이 문을 닫았고, 전해에는 옷 짓고 수선하는 집이 사라졌다. 올해에는 마을에 하나뿐이던 슈퍼마켓이 문을 닫을 모양이다. 인구가 더 감소할 조만간 보건소나 우체국같은 사회 기반시설(인프라)마저 유지하기가 버거워질 일만 남았다. 이미 3300여개 우체국을 거느린 우정사업본부는 ‘세금먹는 하마’라는 반갑지 않은 별칭을 갖고 있다. 작년에 일반 우편사업에서 1700억원 가까운 적자를 기록했다. 고령화와 함께 분산된 거주구조는 지방필수의료의 붕괴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의사가 아무리 많아져도 지방에 민간사립병원을 유지할 수 없을 거라는 주장은 일리가 있다. 현대의료는 고가의 장비에 의존하는데 비용을 회수할 수 없기에 최소의 의료장비조차 투자할 수 없다. 불현듯 “소는 누가 키우나” 라는 옛적 유행어가 떠오른다. 사과 시금치 상추 파
10.08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노래 속 각설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유독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것이 문과-이과 담론이다. 주로 문과 출신이 쓴 글을 통해 ‘인문학적 상상력이 있어야 스티브 잡스 같은 훌륭한 공학자가 될 수 있다’ ‘문과 출신에겐 이과생에게 없는 긴 호흡과 안목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다’는 주장이 전파된다. 쉽사리 동의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가는 이과 출신이라 문해력(文解力)이 부족하다는 비난이 따라붙는다. 개념이 모호할 땐 구체적인 사례를 드는 게 좋다. 물리의 신 뉴턴도 ‘좋은 사례가 이론보다 더 중요하다(Examples are more important than theory)’고 했다. 이과 수업이 이론 강의와 실험 실습, 연습문제 풀이를 병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장과 이론이 현실과 타당하게 들어맞는지 검증하는 게 실험실습이고, 이론을 구체적으로 사례를 통해 풀어보고 이해하는 게 연습문제 풀기다. 긴 호흡이 필요한 문제가 무얼
10.07
서울 근교에 문을 연 지 얼마 안된 음식점에 들렀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보리 비빔밥집이다. 주방 앞에 크게 내건 사장 겸 주방장의 이력과 조리경연대회 수상 경력이 눈에 들어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 소재 호텔 조리부에서 일하다가 군에 입대했다. 베트남에 파병돼 조리병으로 근무하며 사령관 표창을 받았다. 1978년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다시 호텔 부장급 요리사로 근무하다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에서 기능공 식사를 책임지는 영양사 겸 총 주방장을 지냈다. 이어 아프리카 나이베리아에서 레스토랑을 열었다. 귀국해 강원도 춘천, 경기도 남양주에서 한정식과 소머리 곰탕집을 운영하다가 지난해 말 접었다. 그러다 하는 일 없이 지내기 무료해서 8개월 만에 다시 식당을 열었다고 했다. 비빔밥집 사장님처럼 적잖은 경험과 조리대회 우승 경력자라도 요즘 한국에서 음식점 경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식당과 카페 등 업소가 워낙 많고 경쟁이 심한 레드오션이다. 손님들이 대기표를 받
10.02
자고 나면 깜짝 놀랄 뉴스가 터져 나오는 시국이다 보니 웬만한 뉴스는 얼핏 보고 큰 감정 동요 없이 지나칠 때가 있다. 최근 시사주간지 ‘시사인’에 보도된 현직 대통령 신뢰도 조사에 관한 뉴스도 그 중 하나다. 이 매체는 매년 추석 즈음 한국갤럽조사연구소와 함께 ‘대한민국 신뢰도’라는 제목의 여론조사를 해 특집기사로 공표한다. 이번 조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신뢰도 10점 만점에 2.82점으로 역대 최하위를 기록한 것으로 보도됐다. 취임 첫해인 2022년 3.62점, 이듬해 3.63점에서 올해 최저점을 경신한 것인데, 파면되기 전 박근혜 대통령의 말년 신뢰도가 이보다 높은 3.91점이었다는 해설이 붙어 있다. 그렇다고 한들 윤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취임 후 늘 20~30%에서 맴돌았음을 고려하면 이 또한 깜짝 놀랄 뉴스는 아니다. 하지만 대통령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0~10점으로 평가해달라는 항목에 응답자의 44.6%가 0점을 주었다는 대목에서는 적이 놀랄 수밖에 없다. 보통
09.30
한국의 근현대는 일제강점기를 이겨내고 참혹한 전쟁을 겪어낸, 그리고 억압적 독재를 무너뜨린 격정의 역사였다. 고통과 좌절, 희생이 따랐으나 한국인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위대한 역사를 일궜다. 그러나 여기까지인가? 집권세력은 무엇에 홀린듯 역사를 고치고 헌법을 뒤틀며 국가를 자기들 뜻대로 ‘개변’하려고 한다. 이명박 박근혜정권 이래 잠행하던 뉴라이트가 다시 전면에 나서 상황을 주도하고 있다.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순순히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기세가 완강하다. 겉보기에는 정치지형도 이들의 사상공작 정치운동에 유리하다. 집권여당이 이명박정권의 친미일 반북, 친기업 반서민, 언론장악 기도 등을 답습하고 있어서다. 권력이 국민들에게 겸손할 생각이 없는데다 의회주의 정당정치라는 정치규칙을 막무가내 무시하고 있는 것도 유리한 환경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번에도 성공하기 어려워 보인다. 권력의 오만과 부패, 의료 대란 등 거듭되는 실정으로 민심이 이반하고, 친일과 이승만 독재에 비판적인
09.26
우리 사회에 다시 ‘자유’라는 기본권 침해가 쟁점이 되고 있다. 특히 신체의 자유와 언론ㆍ출판의 자유가 훼손되고 있다는 문제제기가 심각하다. 법조계와 언론계에 광범위하게 확산하고 있다. 법조인이 ‘법기술자’, 기자가 ‘기레기’로 조롱당하는 현실이 그것을 반영한다. ‘자유’에 대한 개념도 보수와 진보진영이 각자 제멋대로 쓴다. 그렇지만 어디에서도 진지한 담론은 들을 수 없다. 인권이라는 본질적 문제에 대한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현실을 보며 생각한다.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법률이 정한 범위 내에서 구속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영어 표현을 보면 좀더 정밀하게 구분한다. 프리덤(Freedom)과 리버티(Liberty)다. 프리덤은 보통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능력으로 쓰인다. 어떤 힘 앞에서도 마음먹은 대로 행위를 감행할 수 있는 힘(The power to do)을 의미한다. 반면 리버티(Liberty)는 인간에 대
09.25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의 시민이었던 플라톤은 그의 저서 ‘공화국’에서 전쟁의 기원이 사람들이 소박한 생활을 넘어 사치스런 생활을 하기 위해 이웃의 땅을 원하는 탐욕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제적 동기만이 전쟁의 원인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 권력자의 영역확대를 향한 욕망이 전쟁의 원인이 된다. 역사 속의 숱한 정복자들이 좋은 예다. 원인이 무엇이든 전쟁 없는 세상은 없는 게 인류가 경험하는 현실이다. 목하 세계에는 두 개의 전쟁이 치러지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과 이스라엘과 가자지구 및 레바논 간의 전쟁이 그것이다. 둘 다 크게보면 국제정치 상 패권국가들 간의 세력다툼의 일환이다.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은 미국과 그 동맹국인 서유럽국가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서방세력의 지원이 없다면 두 나라는 벌써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그 반대급부로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서방세력을 적대세력으로부터 방어하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09.24
사진은 초상권이 달린 데이터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입학원서나 입사원서에서 사진을 요구하지 않는다. 입학이나 입사 후에 학생증이나 사원증을 만들 때 사진을 찍는다. 그것도 사진을 찍어 가져오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현장에서 촬영한다. 초상권을 존중할 뿐만 아니라 사진에 대한 관리까지 하겠다는 의지가 듬뿍 담겨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온갖 신청서류에 사진을 요구하며 대개 사진관에 가서 찍도록 만든다. 초상권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렇게 관리가 안된 사진이 딥페이크를 만드는 데 무분별하게 유통되고 있다. 이게 국내 현실이다. 사진을 재산권이 달린 데이터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부동산과 자동차를 이렇게 허술하게 관리하지는 않는다. 이구동성으로 지금은 데이터 시대라고 한다. 어떤 데이터든 가장 처음 만들어질 때 데이터 출처를 표시하도록 강제하기만 하면 정품 데이터인지 아니면 허위 데이터인지 구분하는 일이 충분히 가능해진다. 인공지능(AI)이 대두되면서 AI가
09.23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까닭은 언제나 기득권의 저항을 극복하는 난제 때문이다. 개혁을 저돌적인 의지만으로 이뤄내기란 불가능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연금·의료·교육·노동의 4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취임 6일 만에 국회 시정연설에서 노동·연금·교육 3대 개혁을 선언했다. 하지만 임기 절반 가까이 되도록 선행 개혁과제는 물론 올해 초 추가한 의료개혁에 이르기까지 이렇다 할 결실을 보여주지 못했다. 윤 대통령이 개혁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데는 개혁의 기본을 모르는 탓이 크다. 모든 개혁에는 세밀한 사전 정지작업과 각고정려한 설득의 리더십이 필수다. 그런데도 무모하게 돌진하는 돈키호테 같은 스타일로 말미암아 개혁의 동력을 꺼트리는 일이 더 잦았다. 개혁의 선봉장으로 내세운 인물들은 설득자이기는커녕 애물단지처럼 됐다. ‘모르면 용감해진다’는 말은 일찍이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갈파했다고 전해진다. 미국 사회심리학자가 이를 실험
09.19
1996년 12월 초다. 당시 명지대 총장인 고 건씨가 연락했다. 기사 중 약력에 전북 출신으로 잘못 기입돼 있다는 거다. 부친이 서울 근무 중 마포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본적과 부친의 생활 근거지는 전북이 맞지만 출생지는 서울이라는 취지다. 출생과 출신 용어를 두고 가벼운 입씨름이 있었다. 그날 저녁 서울 혜화동 음식집에서 만났다. 진보매체의 정치부 기자와 동석이었다. 술잔을 돌리며 담소를 나누는데 각종 사회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당시 퇴폐적으로 여겨졌던 비디오방을 궁금해했다. 자연스레 인근 비디오방을 찾아가 고씨를 알아 본 주인의 도움으로 구석구석 살펴봤다. 이어 호프집으로 옮겨 대학생들과 어울렸다. 청년들 관심사에 관심을 보였고 건배도 했다. 포장마차에 들어가서는 어묵 꼬치에 소주를 마시던 직장인들의 애환도 들었다. 이쯤이면 명약관화했다. “총리 제의를 받으셨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말 증후군, 즉 레임덕에 빠져 있었다. 차남 현철씨가 구설수에 올랐고 남북관계도
09.12
올 여름은 정말로 심하게 더웠다. 8월의 폭염일수는 16일로 1973년 통계 집계 이후 두번째로 많았고 열대야 일수는 11.3일로 두자릿수를 처음으로 기록했다. 특히 놀랍게도 8월 5일(93.8GW), 12일(94.5GW), 13일(94.6GW), 19일(95.6GW), 20일(97.1GW) 이렇게 무려 다섯차례나 최대 전력수요 기록이 경신되었다. 그래도 발전소의 적기 건설과 안정적 운영을 위해 많은 이들이 고생했기에 정전의 위험없이 올 여름을 잘 넘기고 있는 중이다. 전력과 관련해서는 섬과 다를 바 없고 에너지 수입의존도가 세계 최고 수준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전력수급이 안정적이라는 점은 수출주도형 제조업 경제를 지탱하는 원동력이자 우리의 자랑거리다. 밤기온이 내려가 이슬이 맺히는 완연한 가을을 나타내는 백로(白露)가 지난 7일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급기야 지난 10일에는 서울에 사상 첫 9월 폭염경보까지 발령되었다. 그날 정부, 한전 및 전력거
09.11
지난 2월 정부의 의대정원 증원정책에 반발해 전공의 등이 병원을 떠난 이후 6개월 넘는 병원 응급실 공백사태로 추석연휴 의료대란이 우려되고 있다. 대한응급의학의사회 비상대책위원회는 9일 “추석은 명백한 응급의료 위기”라고 밝혔다. 이미 한계상황에 다다른 병원들의 응급실 폐쇄, 주말 야간 휴진도 잇따르고 있다. 10개월 영아와 공사장 부상자가 응급 치료를 받지 못해 숨지거나 의식불명에 빠진 최근 사례가 가뜩이나 환자가 늘어나는 명절연휴를 더욱 두렵게 만든다. 이런 상황에서 집단행동으로 병원을 떠났다가 개별 복귀한 전공의들의 명단을 공개하며 ‘배신자’ ‘부역’ 등의 표현을 달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공개해온 의료계가 추석연휴 응급실 근무자의 명단을 추가 발표하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추석기념 수련병원 응급실 특별편’(명단)을 7일 신설한 것은 전공의가 복귀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게 낙인을 찍자는 의도이다. 군의관 추정 5명을 포함한 의사 100여명의 명단이 공개되었다. 응급실부역
09.10
아침 저녁으로 서늘해진 걸 보니 가을인가 봅니다. 습한 폭염과 한달 이상 계속된 열대야로 축 늘어지고 혼미했던 몸과 마음이 이제 살 것 같습니다. ‘기후변화’가 느닷없이 툭 튀어나온 일은 아니지만 올해처럼 그 영향을 피부로 느꼈던 해도 드물지 않나 싶습니다. 매달 평균기온의 기록이 깨지는가 하면, 최저기온이 25℃ 이하로 떨어지지 않은 열대야가 사상최대 일수를 기록했다는 뉴스가 쏟아지는 것을 보며 과연 지금 우리가 누리는 문명생활이 유지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순진하게 재롱을 떠는 아이들을 볼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지구온난화의 열기가 인간 삶의 구석구석을 전방위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생태계의 파괴로 농작물 재배체계가 헝클어져 곡물 야채 과일값이 치솟고 커피값이 오릅니다. 바닷물이 뜨거워지면서 어패류 생태계도 바뀌니 어민들이 비상입니다. 경제기사에 ‘기후인플레이션’이란 용어가 나타났습니다. 공기흐름에 민감한 비행기도 안전운항에 위협을 느끼는 모양입니다. 기
09.09
블록버스터는 영화용어다. 상업적 흥행을 목적으로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 만드는 영화다. 대형세트와 많은 인력이 투입되고, 다양한 특수효과가 도입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국정브리핑에서 이를 경제용어로 끌어들였다. 윤 대통령은 “경제전문매체 블룸버그는 우리 수출 증가를 ‘블록버스터급’이라며 한국경제붐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이라고 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경제가 확실히 살아나고 있고, 앞으로 더 크게 도약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이 보고 싶은 좋은 경제지표만 보고받는 느낌이다. 국정브리핑 사흘 뒤 집계된 8월 수출액은 전년 대비 11.4% 증가한 579억달러. 수출은 11개월 연속 플러스 행진이다. 무역수지도 15개월 연속 흑자를 기록했다. 문제는 이런 수출의 온기가 좀처럼 내수로 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수출의 일등공신은 전체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반도체다. 수출호조를 이끄는 품목 대부분이 고용유발 효과가 낮고 자본집약적인 정보기술(IT
09.05
어린 시절 경험 중 아직도 납득이 안되는 것이 단체기합이다. 그 당시 신체적 고통보다 괴로웠던 건 ‘내 잘못이 아닌데 처벌받는다’는 억울함이었다. 지난해 R&D 예산 삭감이라는 이름으로 과학기술 연구자들에 대한 연구비 삭감 통보를 받았을 때 떠오른 단어가 바로 단체기합이다. 잘못한 친구가 누구인지, 카르텔이 무엇인지 이름도 존재도 알지 못해 억울함이 더했다. 요즘엔 연구비 삭감 조치가 사실은 ‘재조정’이었고 과학기술 연구자들은 의사들과 달리 별 저항없이 고분고분했으니 내년부터는 본래 수준의 연구비로 ‘재-재조정'해준다는 말도 들려온다. 억울하게 단체기합을 받은 게 아니라 그 동안 문제가 많았던 과학기술 연구자들의 느슨한 정신상태를 바싹 조이는 재조정 과정을 한번 거친 뒤 연구비를 복원해준다는 말로 들린다. 소설 ‘동물농장’에서 동물들이 사육되던 공간의 이름이 ‘매너농장' 에서 ‘동물농장'이 되었다가 다시 ‘매너농장'이 되고,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나쁘다'는 구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