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3
2024
인간은 살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사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오늘날의 사회는 시장사회라는 말로 지칭되는 것처럼 시장을 떠나서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서는 인간으로서의 모습과 생활 등 삶 자체를 영위할 수 없다. 세상에 그냥 그렇고 그런 헐거운 사회, 살만한 사회를 찾기 쉽지 않다. 시장사회가 인간에게 미치는 무지막지한 영향을 분석해 명성을 얻었던 폴라니(Karl Polanyi)는 ‘거대한 전환: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을 통해 기존사회 스스로 진화·발전해 시장사회로 진입되지 않았음을 밝힌다. 시장경제의 등장과 부상이야말로 국가의 강력한 개입과 사회개조를 통해 인류의 사회구조와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를 끼쳤다는 것이다. ‘시장 메커니즘’이라는 미명을 붙였지만 실질은 악명 높은 ‘사탄의 맷돌’로서 인간과 자연을 통째로 갈아버리는 시장기반사회가 조성된 것으로 경제가 사회적 맥락에서 일탈하고 전복해 오히려 주도해 가는 체제다. 시장사회에서 인간은 노동시장을 통해 임
05.22
생태계에서 생물 사이의 관계는 다양하다. 그 첫번째 관계는 ‘경쟁’이다. 먼저 먹이와 서식처를 차지해야 살아남는다. 생태계 경쟁의 가장 드라마틱한 사례는 탁란(托卵)이다. 특정 종류의 새가 다른 개체의 둥지에 알을 낳으면 그 둥지의 어미가 돌보고 알에서 나오면 먹이를 주며 키우기까지 한다. 그런데 먼저 부화한 남의 새끼는 본능적으로 아직 부화하지 않은 대리모의 알을 등으로 밀어 바닥으로 추락시킨다. 친자를 거세해 계모를 독점하려는 극한 경쟁을 보여준다. 두번째 생물 간의 관계는 ‘포식’이다. 다른 개체를 먹이로 삼는 것으로 식물을 먹는 초식동물과 다른 동물을 먹는 육식동물이 있다. 포식은 먹이가 되는 개체의 생명을 빼앗기도 한다. 세번째 생물 간의 관계는 ‘기생’이다. 다른 개체를 먹이로 삼지만, 포식과 달리 먹이 개체에 큰 손상을 주지 않고 먹이 개체가 만든 영양물질을 활용해 살아간다. 여기에 기생인지 포식인지 애매한 동충하초 같은 균류도 있다. 네번째 관계는 악어와
05.20
바이든의 재선인가, 트럼프의 컴백인가? 5개월 보름 앞으로 다가온 미 대선은 전세계의 관심사다. 누가 당선되는가에 따라 향후 국제질서와 세계경제 판도는 크게 달라진다. 현재 여론조사에서 양자대결은 바이든 46%, 트럼프 46%로 동률이다.(3208명, 5.8~15, 로이터/입소스) 그러나 미 대선은 전국 득표율보다 경합주 판세가 중요하다. 경합주는 러스트벨트(Rust Belt)의 미시간 위스콘신 펜실베이니아와 선벨트(Sun Belt)의 조지아 애리조나 네바다다. 바이든 대통령은 러스트벨트 3개 주에서 승리하면 재선에 성공할 수 있다. 여기서 이기지 못하면 선벨트에서 만회해야 한다. 현재 경합주 판세는 트럼프가 우위에 있다. 정치전문매체 ‘더힐(The Hill)’에 의하면 러스트벨트 3개 주에서 트럼프가 바이든에 1~3%p 앞서고 선벨트 3개 주는 트럼프가 3~6%p 이상 우세다. 무엇이 판세를 움직일까? 바이든 트럼프 모두 정치적 리스크를 안고 있다. 미 유권자가 체감하는
05.17
철옹성이 무너졌다. ‘그들만의 52년 리그’는 산산조각 났다. 끼리끼리 아랫목을 넘겨주던 ‘오만한 레거시’는 끝났다. 최소 3년은 그렇다. 그 자리를 되찾으려면 몸부림쳐야 한다. 성과와 비전과 신뢰를 보여줘야 가능하다. 세상은 휙휙 변하는데 그럴 것 같지도 않다. 고답적 연구, 무딘 현실감각, 연줄 실타래가 그런 우려를 낳는다. 바로 대한민국 교육학자들 얘기다. 공석이던 한국교육개발원(KEDI) 원장이 바뀌었다. 문재인정부가 임명한 류방란 전 원장이 물러난 지 6개월 만의 일이다. 1972년 KEDI 설립 이래 처음으로 경제학자가 수장이 됐다. 제20대 KEDI 원장으로 취임한(4월 29일) 고영선 원장은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 거시·금융경제연구부장, 재정·사회개발연구부장, 연구본부장, 부원장을 거쳤다. 박근혜정부 시절 국무조정실 국무 2차장과 고용노동부 차관을 지냈다. 아무리 뜯어봐도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
05.16
지난 14일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 상품에 강력한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함으로써 이젠 중국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할지 세계가 숨죽이고 바라보는 형국이다. 몇년 전부터 보호주의 먹구름이 잔뜩 끼었던 불안한 세계 정치경제에 본격적으로 폭우가 쏟아져 내리는 불행이 닥칠지 걱정이다. 이번에 미국이 발표한 일련의 조치는 양국 간 본격적으로 관세전쟁을 벌이겠다는 선전포고와 같다. 세계적으로 경쟁력을 가진 중국의 전기자동차 수출에 대해 현재 25%의 관세를 100%로 올리겠다는 충격적인 조치가 대표적이다. 특정상품에 대해 100%의 관세를 부과하는 무역정책은 자유무역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국제질서를 부정하는 셈이다. 미국이 주도해서 만들어낸 80년의 전통을 스스로 깨부수는 모양이다. 하물며 자동차산업처럼 자유무역과 세계화의 바람을 타고 발전해 온 상징적 부문에서 취한 조치이기에 놀라울 따름이다. 100%의 관세란 아예 수입을 금지하겠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
05.13
조선시대 신문고(申聞鼓)는 국가가 국민 의사를 수렴하는 창구의 대명사였다. 최초 이름은 등문고(登聞鼓)였다. 북을 두드려(鼓) 국민이 억울함을 말하고(申), 국가가 듣는(聞) 제도다. 조선시대 신문고는 재판에 불만이 있는 경우에도 두드려졌다. 무고를 목적으로 신문고를 치면 처벌됐다. 국민과 소통하며 국민의 지지를 받는 국가만이 존속할 수 있다는 이념을 배경으로 한다. 원칙없이 국민에 끌려다니는 정부도 문제이지만 국민의 입을 막고 국민의 소리에 귀 막은 정부는 성공할 수 없다. 현대판 신문고로 불렸던 청와대 국민청원은 문재인정부 때 운영되었던 국민의사 수렴창구다. 미국 오바마정부의 ‘위더피풀’이 그 모델이다. 국민 누구든 국정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30일 동안 20만명 이상의 추천을 받으면 정부가 답변을 해야 했다. ‘잊혀진 권리’로 인식되던 헌법의 청원권을 부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문재인정부 임기 5년 동안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약 110만건 이상의 청원이 올라
05.10
고대 그리스신화의 ‘이카루스의 날개’에서 미루어 짐작컨대 이미 기원전부터 사람들은 새처럼 하늘을 날고자 하는 욕망을 끊임없이 분출했던 것 같다. 물론 비행에 대한 기초이론과 형태는 16세기 초에 와서야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의해 정립되었고, 이후로도 많은 사람들의 도전을 거쳐 마침내 1903년 인류역사 최초로 라이트 형제에 의해 날아오를 수 있었다. 비행기는 사람과 물자를 운송하는 수단으로 현대사회에서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요소다. 그러나 아직까지 비행기는 이착륙을 위한 별도의 공항시설을 갖추어야 하고 조종사 역시 특별한 직업군으로 분류되고 있어 일반인에게는 마치 미지의 영역처럼 느껴질 수 있다. 조종사의 직접 탑승 없이 지상에서 원격조종 혹은 사전에 프로그램된 경로를 따라 자동 혹은 반자동으로 자율비행할 수 있는 무인항공기(UAV, Unmanned Aerial Vehicle)는 이미 1918년에 개발되고 실증에 성공했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각광을 받았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05.09
우리나라는 지난해 전례없는 출산율(0.72)이 기록되면서 저출산정책 자체가 무용지물인 상황에 이르렀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출산이나 육아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형태로 대응해왔다. 과연 이러한 정책들이 적실하고 타당성 높은 내용으로 구성되었는가를 숙고해야 할 시점이다. 여기서는 일본의 한 지표를 통해 출산율에 영향을 주는 또 다른 시각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희망출생률’이라는 지표가 있다. ‘젊은 세대의 결혼 임신 출산의 희망이 실현되었을 때 나타나는 출생률’로 정의된다.‘희망’이란 출산율과 관련된 결혼이나 자녀를 갖고자 하는 마음과 그 실현 예상을 합친 개념이다. 결혼하고 싶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희망과 함께 이상적인 자녀수를 가질 것이라는 예상도 포함되어 있다. 희망출생률은 이러한 개념들을 산식으로 구성해 수치화한다. 이 지표는 지방소멸론을 주장한 마스다 히로야 전 총무대신이 인구급감을 멈추는 최우선 과제로 국민의 희망출생률을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에
05.08
윤석열정부 취임 이후 처음으로 영수회담이 있었으나 정국의 변곡점이 되지 못하고 불신의 벽만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여권의 대참패로 귀결된 선거결과에서 국정기조와 당정관계의 변화의 가능성을 기대했지만 여야 대치가 완화되거나 상호존중의 정치문화가 등장할 가능성도 희박해졌다. 대통령의 ‘태도’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실 비서실장은 야당이 꺼리는 친윤의 중심인 정진석 의원으로 정해졌다. 국무총리 인선을 봐야 알겠지만 영수회담 때 윤석열 대통령이 논의의 테이블에 올리지 않은 걸 볼 때 중도적이며 통합 이미지를 갖는 인사가 내정될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여당 역시 마찬가지다. 전대미문의 대참패를 맛본 집권여당 국민의힘은 여소야대를 민주화 이후 일상적으로 나타나는 정국구도로 보는 것 같다. 황우여 전 의원을 비상대책위원장에 임명하고, 친윤 핵심 이철규 의원이 원내대표로 거론됐던 사실만 봐도 그렇다. 게다가 비대위의 성격을 ‘관리형’ ‘실무형’으로 규정했다. 선거 참패의 원인을 찾
05.03
삼성의 갤럭시24 시리즈는 ‘첫 AI 스마트폰’이라는 마케팅을 펼치고 있는데, 골자는 인터넷 연결 없이도 스마트폰 자체적으로 챗GPT와 비슷한 통번역 기능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디바이스 자체에서 챗GPT같은 강력한 AI기능을 제공하는 것을 온 디바이스(on-device) AI 라고 한다. 갤럭시24 시리즈의 흥행 성공으로 애플과 구글도 서로 온 디바이스 AI를 차기 아이폰과 픽셀폰 등에서 선보이려고 하고 있다. 어차피 챗GPT 같이 서버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를 인터넷을 통해서 사용할 수 있는데, 왜 굳이 디바이스 자체에 AI기능을 넣으려고 하는 것일까? 온 디바이스 AI에는 여러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AI기능을 활용하기 위해 데이터를 서버로 전송하지 않고 장치에 남아있기 때문에 민감한 사용자 개인정보를 보호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둘째, 디바이스 자체에서 데이터를 직접 처리함으로써 데이터를 원격 서버로 전송하고 다시 받아오는데 걸리는 지연시간을 획기적으로
05.02
윤석열 대통령 취임 2년 만에 이뤄진 여야 영수회담이 싱겁게 끝났다. 결과의 시시함에 반해 (친)야권 진영의 비판은 꽤나 매섭다. 총선에서 대패했으면 국정기조를 바꿔야 하는 데 그럴 기색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게 골자다. 총선 이전과 마찬가지로 국정운영에 있어서 독단-독선-독주 양상이 이어질 것이라는 게 중평이다. 대통령 가족(김건희 여사) 비리 의혹, 해병대 채 상병 사망 사건, 이태원 참사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법 통과와 이를 위한 대통령 거부권 행사의 자제, 그리고 민생회복 지원금 실시 여부 등 시시비비와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여러 의제들에 대해 윤 대통령이 수용불가라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는 설명(변명)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실이나 더불어민주당의 회담 준비 양상을 보면 쟁점 사안에 대해 합의를 도출하는 게 딱히 목적인 회담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퇴장하는 기자들을 다시 불러 자신의 요청 의제 및 사항을 공개적으로 밝힌 것도, 윤
04.29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이란 ‘자신에 관한 정보가 언제 누구에게 어느 범위까지 알려지고 또 이용되도록 할 것인지를 그 정보주체가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할 수 있는 권리’로 정의된다. 정보통신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개인정보를 수집·처리하는 국가의 개인에 대한 감시능력은 현저히 증대된다. 따라서 이러한 개인정보의 노출 위험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고 개인의 자기정보에 대한 결정의 자유를 구현하기 위해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이 기본권으로서 정립되었다. 지난 목요일에 헌법재판소가 중요한 결정들을 많이 쏟아냈는데 필자는 코로나 관련 이태원 기지국 접속자 정보수집사건에 대한 헌재결정에 눈길이 간다. 구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조항은 질병관리본부장 등으로 하여금, 중앙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 의료기관, 법인이나 개인 등에 대하여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및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의 제공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고, 요청을 받은 국민은 이에 따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04.26
지난 4월 22일은 지구의 날이다. 세계 192개국 약 10억명이 참여하는 세계적인 기념일이다. 올해 세계의 공통 주제는 ‘지구 대 플라스틱(Planet vs Plastics)’이다. 플라스틱 생산량은 최근 수십년 새 급증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전세계 플라스틱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 2억3000만톤이었던 전세계 플라스틱 생산량은 2019년 4억6000만톤으로 증가했고, 2060년 12억3100만톤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현재 플라스틱 폐기물의 9%만 재활용되고 나머지 대부분은 환경에 축적되는 등 플라스틱으로 인한 환경오염 문제가 갈수록 심각하다. 지난해 국내 유명 회사의 과자에서 하루 평균 섭취량의 70배에 달하는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됐다는 보도가 나와 논란이 됐다. 연초에는 1리터 생수에서 약 24만개의 미세플라스틱이 검출됐다는 미국 컬럼비아대 연구결과가 발표돼 큰 충격을 줬다. 이제 미세플라스틱은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 상존하고 있다. 근래에
04.25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 한국식 발전 모델이 흔들리고 있거나 수명이 다했다는 외신 보도를 최근 자주 접한다. 한때 경제성장과 민주화라는 두 가지 난제를 단기간에 달성해 후발 국가의 롤 모델이 됐던 나라가 이제 단기간에 쇠락한 국가로서 또 하나의 드문 사례를 남길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하곤 한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22일 한국 경제 상황을 자세히 분석하면서 값싼 에너지와 노동력에 의존한 국가 주도 성장모델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보도했다. 국내 언론은 이를 비중 있게 소개하면서 대체로 뼈아픈 지적이라고 논평했다. FT가 꼽은 우리 경제의 위기 요인은 새삼스러울 게 없는 내용이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구조, 저출생 고령화 문제, 낮은 노동 생산성, 기반기술 부족 등 그동안 국내에서도 숱하게 지적돼온 것들이다.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부문에서도 한국의 민주주의 후퇴 또는 기반 약화를 지적하는 외신 보도가 잦다. 지난 10일 프랑스 르몽드는 한국 총선 소식을 전하면서 “독재적 성
04.24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진보정당으로 불려왔던 정당들이 이번 총선에서 참혹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원내 6석을 기반으로 도약을 꿈꾸었던 녹색정의당은 원외정당으로 퇴출(?)당했다, 사회적 약자의 이익을 옹호하고 정의 실현을 위해 앞장서 왔음에도 민심으로부터 거부당한 꼴이다.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많은 사람이 당혹감과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때로는 직접 몸을 담그기도 하고 때로는 가까운 거리에서 관찰해왔던 입장에서 한층 냉정하게 그 원인을 찾아보고자 한다. 국민이 진보정당에 기대하는 핵심 지점은 세상을 바꾸어 사회구성원의 삶을 한껏 고양시키는 데 있다. 고전적 표현을 빌리자면 ‘변혁적 전망’을 담은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처참한 실패를 겪어야 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97체제’라 부를 수 있는 전혀 새로운 지배체제가 수립되었다. 핵심은 돈을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철저히 비용으로 간주하며, 무한경쟁을
04.22
‘코인은 사기다’라는 통념이 무색하게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 SEC)는 지난 1월 ‘비트코인 현물 ETF(Exchange Traded Fund)’를 최종 승인했다. 여기서 ‘비트코인 현물 ETF’란 비트코인을 기초자산으로 하는 상장지수펀드를 의미한다. 아시아의 금융허브라 일컬어지는 홍콩에서도 지난 4월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현물 ETF를 조건부 승인한 것으로 파악된다. 비트코인의 제도권 금융 편입은 비트코인에 대한 단순한 내재가치 논쟁은 더 이상 실익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트코인이 제도권에 편입되었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탈중앙화·무정부 상태의 가상자산시장의 위험이 제도권 금융에 전이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도권 금융의 통제와 간섭이 가상자산시장에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떻게 보면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을 전후해 창펑자오(전 바이낸스 CEO)에서 블랙록(미국의 자산
04.19
교육부가 얼마 전 ‘수능 공정성 강화 방안’을 내놓았다. 전국 수험생이 오는 11월 14일 치를 수능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 사설학원 모의고사에 나온 문제와 비슷한 문항이 수능에 얼씬하지도 못하도록 하겠다는 게 핵심이다. 당연한 일이다. 한데 방법이 틀렸다. 대형학원이나 사교육업체에 요청해 모의고사나 문제지를 일괄 제출받고 문제지 발간 계획도 받아 사전 검증하는 작업이 가능한가. 전국에는 사설학원이 수만개나 된다. 입시학원은 나름대로 수능 모의문제를 개발하고 모의고사를 치른다. 교육부가 서울의 대형학원만 겨냥한 것이라면 단순한 ‘겁박 쇼’에 불과하다. 학원의 문제집을 몽땅 검토하려면 교육부 직원을 다 동원해도 불가능하다. 의지는 평가할 만하지만 과유불급이다. 학원이 출제한 문제나 발행 예정인 문제지를 교육부에 제출할 법적근거도 없다. 전국의 빵집에 현재 팔고 있는 빵이나 새로 만들 빵 목록을 정부에 제출하라고 할 수 있나. 망국적 사교육은 반드시 없애야 한다. 그러려면 합리적이
04.18
‘운동권’으로 통칭되는 암울한 군사정권 시대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며 온갖 고생을 했던 인사들이 2024년 총선을 치르며 여야 정치권 모두에서 천덕꾸러기나 구경거리로 전락했다. 심지어 서울 마포을 선거구에서는 미 문화원을 점거한 여당 후보와 미 대사관저를 쳐들어간 야당 후보가 대결했다. 승패를 불문하고 여당은 민주화 운동 경력의 왕년의 투사들을 개그 소재 수준으로 격하시키는데 성공했다. 더불어민주당 내부에서도 구닥다리 운동권 때문에 되는 일이 없으니 세대교체로 이미지를 쇄신하자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검찰독재를 막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뭉친 원로 민주인사들이 야권 비례연합 정당에 추천한 활동가 출신 후보들도 달라진 유권자의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현실적 이유로 잇달아 교체됐다. 일반 시민이 보기에는 수십년 전의 민주화 운동 경력을 내세운 권력투쟁에 불과하다. 필자는 영구집권을 노리는 박정희가 10월 유신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일으킨 1972년에 대학에 입학한 세대다. 계엄령 휴
04.17
이제 인공지능(AI)은 인류에게 명백한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과의 바둑대국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AI는 게임의 규칙 이상이 요구되는 영역에서 인간을 능가하거나 적어도 모방할 수 있을 것인지는 여전히 불확실했다. 그러나 현재 약인공지능(artificial narrow intelligence), 즉 특정 과제를 인간의 의도에 따라 수행하는 AI의 성능은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있다. 번역 AI의 품질 역시 지속적으로 개선돼 인간 번역사의 번역에 필적한다. 특히 최근 챗GPT로 대표되는 대형언어모델(Large language model, LLM)의 자연어 처리 능력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동영상 생성 AI인 소라 역시 간단한 텍스트를 바탕으로 놀라운 수준의 동영상을 생성해낼 것으로 기대된다. AI가 인류의 고차원적 사유능력이 요구되는 지식산업 영역에서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예측은 이제 대세가
04.15
22대 총선 기간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에 등록된 여론조사는 1990건이다. 21대 총선의 1122건과 비교하면 77% 증가했다. 여기에 당내 경선 조사와 정당과 후보자의 비공개 조사를 합하면 여론조사 건수는 더 늘어난다. 선거 기간 여론조사 숫자에 담긴 예측성과 확정성은 승부의 향배를 시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개표가 끝나면 여론조사도 시험의 무대에 오른다. 일반 사회조사와 달리 선거 여론조사는 예측치와 결과치를 직접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도 예외가 아니다. 선거 막바지 여론조사는 선거 결과를 얼마나 정확하게 예측했나? MBC와 서울대 국제정치데이터센터 ‘여론M’ 연구팀은 총선 여론조사를 종합해 베이지안 동적선형모델을 적용한 메타분석으로 여론변화를 추적했다. ‘여론M’에 의하면 4월 1주 전화면접조사(CATI)에서 서울 정당지지도는 국민의힘 37%, 더불어민주당 31.6%, 조국혁신당 10.9%다. 민주당과 조국혁신당 지지도를 합하면 42.5%